초록 융단·분홍 화원에 햇차 향기 그윽하고… ‘차 시배지’ 경남 하동 힐링 여행 기사의 사진
경남 하동군 악양면 형제봉에서 이른 아침 내려다본 평사리 들녘과 섬진강. 일출의 붉은 기운 속에 분홍빛 철쭉이 마지막 잔치를 화려하게 벌이고, 강에서 피어난 물안개가 마을과 들판을 은은하게 덮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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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개(花開), ‘꽃피는 마을’. 화개장터로 널리 알려진 경남 하동군 화개면이다. 4월이면 십리벚꽃길이 화려한 봄을 장식하는 곳. 지천으로 피어나 마음껏 맵시를 뽐내던 봄꽃이 지고 나면 골짜기마다 연둣빛 새순이 치장한다. 눈이 시리도록 푸른 신록의 5월, 녹차의 계절이다. 햇차의 그윽한 향기가 섬진강 바람에 실려 하동의 산야를 뒤덮는다. 천혜의 절경 지리산과 청정 1급수 섬진강, 한려해상국립공원이 품은 하동은 발길 닿는 곳마다 볼거리·즐길거리를 다채롭게 펼쳐놓는다.

지리산, 섬진강, 재첩, 소설 ‘토지’ 등과 함께 하동을 대표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차(茶)’다. 하동은 우리나라 차 시배지(始培地)다. 약 1200년 전 신라 흥덕왕 3년(828년) 당나라 사신으로 갔던 대렴공이 차나무 종자를 가져와 이곳에 심었고, 830년 진감선사가 차를 번식시켰다고 삼국사기가 전한다. 차 시배지 기념비 바로 옆 ‘도심다원’에는 수령 1000년을 넘긴 야생 차나무가 아직도 연둣빛 새순을 키워낸다.

하동이 차 시배지가 된 것은 타고난 기후 덕분. 차나무는 따뜻하고 비가 많이 오는 기후에서 잘 자란다. 화개면 일대는 연평균 기온 13.8도, 연간 강수량 1400㎜다. 자갈이 섞인 하동땅은 차나무가 땅속으로 깊게 뿌리를 내려 온갖 좋은 성분을 빨아들이기에 좋다. 여기에 섬진강과 지리산에 인접해 안개가 많아 습도가 높고, 일교차가 큰 것도 좋은 차를 내는 데 한몫한다.

화개골로 들어서면 초록빛의 차나무가 지천으로 깔려 있다. 농촌 마을의 집 앞마당에 작은 논과 밭이 조성돼 있는 것처럼 화개면에는 마을 곳곳에 크기가 제각각인 녹차밭이 자리하고 있다. 산 전체가 광활한 녹차밭인 곳도 있다. 하동의 녹차는 대부분 야생차다. 잘 정돈돼 가지런한 보성 차밭과 달리 하동 차밭은 경사진 산기슭과 바위틈에 뭉게구름 피어나듯 낮게 깔려 있다. 야생차는 강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올해 이상기후로 재배차가 냉해를 입어 시커멓게 죽어가도 야생차는 푸른 융단을 깔아놓은 듯 초록빛을 맘껏 발산하고 있다.

봄볕에 깨어난 여린 새잎이 산야를 온통 초록으로 물들이는 요즘 찻잎을 따는 작업이 한창이다. 마대를 하나씩 꿰차고 찻잎을 따는 아낙네들의 모습은 한 폭의 수채화. 차는 찻잎을 따는 시기에 따라 우전 세작 중작 대작 등으로 나뉜다. 으뜸으로 치는 차가 우전차다. 곡우를 전후해 돋은 첫잎으로 만든다. 맛과 향, 효능이 뛰어나 명차로 불린다. 한 잎씩 딴 찻잎은 솥에서 덖어 구수한 맛과 향을 지닌 수제 덖음차로 제다(製茶)된다.

밝은 선홍빛을 띠고 은은한 향이 매력적인 잭살차는 ‘한국의 홍차’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차의 빛깔이 붉을 뿐 아니라 차를 만드는 방식도 발효과정을 거치는 등 홍차와 비슷하다. 억센 잎을 차로 마시기 위해 발효 과정을 거치는데 이 과정에서 불소, 비타민C, 카테킨이 발생한다. 감기 기운이 있거나 배앓이를 할 때 잭살차를 마시면 효과가 있다.

하동의 차는 왕에게 진상품으로 올릴 만큼 품질이 좋기로 정평이 났다. 조선시대까지 명목을 이어오던 하동 차는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개량종이 마구잡이로 유입되면서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전통차의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노력한 결과 현재까지 지역 토착 품종을 유지하고 있다.

하동군은 오는 19∼22일 화개면 일원에서 22회 하동야생차문화축제를 개최한다. ‘왕의 차, 세계로 나아가다’를 슬로건으로 한 축제는 차 시배지 명성과 세계중요농업유산에 등재된 명품 하동 야생차 우수성을 홍보하는 데 집중한다. 축제는 대표 프로그램 7개를 비롯해 핵심 프로그램 3개, 공식·경연 8개, 공연·전시·체험 16개 등 모두 9개 분야 43개 프로그램으로 구성된다.

지리산을 품은 하동은 늦은 시기까지 철쭉을 보여준다. 대표적인 곳이 지리산 자락의 형제봉이다. 지리산 남부능선이 섬진강에 잠기기 전에 우뚝 솟아오른 봉우리로, 해발 1115m다. 우뚝 솟은 두 개의 봉우리가 우애 깊은 형제의 모습과 비슷해 얻은 이름이다.

외둔삼거리에서 출발해 등산로를 따라 고소산성, 신선대, 구름다리를 거쳐 오르면 3시간30분가량 걸린다. 그러나 차를 타고 쉽게 접근할 수 있다. 부춘마을에서 형제봉과 가까운 패러글라이딩 활공장까지 포장도로가 이어진다.

활공장에서 형제봉은 능선을 따라 내리막 오르막이 이어지지만 대체로 내려가는 길이어서 수월하다. 40∼50분쯤 헬기장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면 분홍빛 철쭉이 마지막 자태를 뽐내고 있다. ‘산상의 화원’이 따로 없다. 멀리 신선대에 걸쳐진 구름다리가 아득하고, 소설 ‘토지’의 배경이 된 평사리 들녘이 장쾌하게 펼쳐져 있다. 그 너머로 뱀처럼 구불구불한 섬진강이 유장하게 흐른다. 철쭉이 없더라도 신록의 싱그러움 속으로 유유자적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힐링된다.

여행메모

부춘마을에서 차 타고 형제봉 활공장에
섬진강 재첩국·참게매운탕… 맛난 먹거리


수도권에서 경남 하동군 화개면으로 가려면 순천완주고속도로 구례·화엄사 나들목에서 빠진 뒤 용방교차로에서 우회전해 19번 국도를 탄다. 구례를 지나 섬진강을 오른쪽에 두고 달리면 화개장터에 도착한다.

형제봉 활공장은 화개장터와 악양 사이 부춘마을에서 차를 타고 오를 수 있다. 정금마을에서 갈 수도 있지만 경사가 급한 데다 비포장으로 험하다.

섬진강에서 직접 잡아 끓이는 재첩국과 참게매운탕도 맛난 먹거리다. 참게를 껍데기째 갈아 곡물을 넣고 함께 끓여내는 부드러운 참게가리장도 별미다. 찻잎마술(055-883-3316)은 녹차를 밑간으로 활용한 한정식을 낸다. 삼겹살을 녹차 소스로 쪄낸 삼겹살찜도 독특하다. 차꽃 와인과 차, 차씨 오일 등이 곁들여진다. 모암마을 차밭 강 건너 맞은편에 자리잡은 카페 ‘젊은 느티나무’(010-3595-0476)는 차 한잔을 마시며 차밭 감상하기에 제격이다.

하동=글·사진 남호철 여행선임기자 hcna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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