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하윤해] 한국당의 기다림 기사의 사진
1957년 11월 19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산 쿠엔틴 교도소에서 연극이 공연됐다. 연극 단원들은 재소자 1400여명 앞에 섰다. 이 교도소에서 44년 만에 열리는 연극 공연이었다. 공연된 연극은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기승전결’의 전통적인 서사구조를 파괴하고, 인간 존재의 불합리성에 근원적 질문을 던지는 부조리극이 재소자들 앞에 펼쳐진 것이다. 이 작품이 선정된 이유는 여자 배역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었다. 긴장한 연출자가 공연 시작 전 무대에 올라 “이 작품을 그냥 듣고 나름대로 생각할 수 있는 재즈 음악처럼 여겨 달라”고 당부했을 정도였다.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시골길, 부랑자인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고도’라는 인물을 기다린다. 이들이 얼마나 고도를 기다렸는지도 확실치 않다. 블라디미르가 극 중에서 “한 50년?”이라고 말하지만 그의 시간은 불분명하다. 고도는 오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은 내일 또 고도를 기다릴 것이다.

당시 상황을 보도한 샌프란시스코의 지역 신문은 “마차와 여자, 우스갯소리가 나오길 기대했던 재소자들은 분노하며 ‘실내가 어두워지면 나가겠다’고 큰 목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그들은 공연을 보았고 감동받았다”고 전했다. 한 재소자는 “고도는 바깥 사회”라고 생각했고, 다른 재소자는 “고도는 자유”라고 여겼다. 이 희곡을 쓴 베케트는 초연 당시 “고도는 누구이며, 무엇을 의미하느냐”는 질문에 “내가 그걸 알았더라면 작품에 썼을 것”이라는 답을 남겼다.

고도에 대한 기다림이 은유적이라면 ‘정감록’의 기다림은 직설적이다. 정감록은 조선시대 민간에 널리 유포됐던 현실부정적인 예언서였다. 정감록은 한 권의 책이 아니다. ‘감결’ ‘무학비결’ 등 비합리적인 예언을 담은 수십 종의 책들을 총칭한다. 정감록은 금서로 지정돼 수거되기도 했다. 미신과 유언비어 등 ‘요망스러운 낭설’을 담은 책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참화, 사대부들의 무능력, 흉년과 전염병 등에 시달렸던 조선 백성들에게 정감록은 진통제였고, 환각제였다. 정감록의 핵심은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영웅에 대한 기다림이다. 이들은 정(鄭) 도령 또는 진인(眞人)으로 지칭됐다. ‘정 도령이 나라를 세울 것이다’ ‘진인이 남쪽에서 나온다’는 말들이 퍼졌다. 도령의 성이 정씨인 이유는 정몽주, 정도전, 정여립 등 조선 사회에서 개혁을 주창했거나 왕권에 저항했던 사람들 중 정씨가 많았기 때문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한국 정치의 거목들도 정감록을 선거에 활용한 것은 아이러니한 대목이다. 1987년 대선에서 김영삼 김대중 후보는 각각 출생지가 경남 거제도와 전남 하의도라는 점을 들며 “남쪽에서 나온 진인”이 자신이라고 은근히 선전했다. 1992년 대선에서 국민당은 “정주영 후보가 정 도령”이라고 주장했다.

시대는 바뀌었지만 정치판의 막연한 기다림은 계속되고 있다. 자유한국당에서는 보수를 위기에서 구해 줄 새 인물을 기다리는 의원들이 많다.

하지만 새 인물은 무너져가는 집에 오지 않는다. 새 인물이 색깔론과 계파 갈등으로 외면을 당하고 희망을 제시하지 못하는 집에 올 가능성은 거의 없다. 새 인물은커녕 평범한 인물도 한국당과 거리를 두는 게 현실이다. 한국당이 이번 공천에서 ‘올드 보이’들을 다시 불러들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한 한국당 의원은 “이번 지방선거에서 공천 비리는 없을 것”이라는 농을 던졌다. “예전에는 후보들이 공천을 받기 위해 검은돈을 주는 경우도 있었는데, 지금은 출마하겠다는 사람이 없어 의원들이 돈이라도 주고 출마를 부탁해야 할 처지”라는 것이다. 설령 새 인물이 오더라도 좌파 사회주의라는 한국당의 해묵은 대사를 입에 올리는 바로 그 순간 헌 인물로 전락할 것이다. 한국당이 진정으로 새 인물을 맞이하려면 무너진 집을 다시 세우는 쇄신이 필요하다. 그래야 새 인물도 갈 마음이 생길 것 같다.

하윤해 정치부 차장 justic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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