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트’ 지금 우리 함께, 긴 어둠 끝 푸른 희망으로 [리뷰] 기사의 사진
연극 ‘페스트’의 한 장면. 의사 리유가 페스트에 걸려 고통스러워하는 환자를 치료하고 있다. 울먹이며 이 광경을 지켜보는 이는 환자의 아내다. 국립극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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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에 위치한 어느 외딴 섬. 평화롭던 도시에 갑작스러운 역병이 돈다. 죽은 쥐들이 하나둘 눈에 띄더니 그 수는 며칠 만에 수만 마리에 이른다. 포대자루로 날라다 버려도 끝이 보이질 않는다. 급기야 사람들까지 비슷한 증세의 열병을 앓다 죽어나가기 시작한다.

섬은 장벽을 사이에 두고 둘로 나뉘어져 있다. ‘이쪽’ 사람들은 ‘저쪽’에서 페스트가 번져왔을 거라 의심하고 원망한다. 전염병의 확산을 막기 위해 섬 폐쇄 명령이 떨어지고, 고립된 사람들은 점점 지쳐간다. 그야말로 생지옥이 따로 없다.

하지만 의사 베르나르 리유(이찬우 임준식)는 포기하지 않는다. 한 생명이라도 더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동분서주한다. 혼자는 아니다. 간호사, 도청 직원, 기자, 동네 한량들까지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보탠다. 핏빛으로 물든 도시에는 그렇게 푸른 희망의 빛이 스민다.

연극 ‘페스트’는 프랑스 소설가 겸 극작가 알베르 카뮈(1913∼1960)의 동명 소설을 각색한 작품. 박근형(55) 연출이 5년 만에 선보이는 국립극단 복귀작이기도 하다. 2013년 국립극단에서 올린 연극 ‘개구리’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의 도화선이 되면서 박 연출은 정부 지원에서 전면 배제됐었다.

원인 모를 페스트로 아수라장이 돼버린 둘로 나뉜 섬. 극 중 상황을 들여다보면 우리가 마주한 현실과 여러 부분 중첩된다. 간단하게는 몇 해 전 겪은 메르스 사태 등이 떠오른다. 재난 앞에서 시민들의 눈부터 가리고 보려는 권력층의 초반 대응도 낯설지 않다.

실체 없는 미움의 씨앗을 틔워 좌와 우로 가르고 반목하는 모습은 또 어떠한가. 섬을 이분하는 굳은 장벽은 한반도를 가로지르는 철조망처럼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과연 우리 시대에 ‘페스트’란 무엇인가. 그 질문에 대해선 관객마다 다른 답을 내놓을 것이다.

원작과 달리 주인공 리유 역이 내레이터(이찬우)와 의사(임준식) 2개 역할로 나뉜 점이 특이하다. 120분이라는 한정된 시간 안에 보다 효과적으로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 내레이터를 투입했다. 나이가 지긋해진 중년의 리유가 페스트 사태를 회상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내레이션이나 음악으로 채운 장면 연결은 매끄럽다. 분단된 섬을 시각화한 무대, 완벽한 절망과 미세한 희망을 표현해낸 조명도 탁월하다. 박 연출은 “혼란하고 어두운 시대를 지나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관객들에게 응원과 연대, 위로를 전하고 싶다”고 했다. 6월 10일까지 명동예술극장.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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