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라동철] 비핵화 여정, 역지사지가 절실하다 기사의 사진
순풍에 돛을 달고 순항하는 듯하던 배가 주춤하고 있다. 다음 달 12일 싱가포르 정상회담을 향해 나아가던 북한과 미국 얘기다. 표면적으로는 북한이 먼저 어깃장을 놨다. 지난 16일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을 내세워 미국이 일방적으로 핵 포기만을 강요하고 있다며 정상회담을 재고려할 수 있다고 포문을 열었다. 미국도 맞받아쳤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2일(현지시간) 한·미 정상회담을 갖기에 앞서 기자들을 만나 “우리가 원하는 특정한 조건들이 충족되지 않으면 북·미 정상회담이 열리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CVID(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를 수용하면 북한 정권의 안전을 보장하고 경제적 지원을 하겠지만 딴마음을 품는다면 거래를 중단할 수 있다는 경고였다.

북·미 정상회담의 차질 없는 진행을 위해 노력하기로 한·미 정상이 뜻을 모았다고 하지만 24일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의 담화는 사태의 심각성을 다시금 환기시켰다. 최 부상은 ‘리비아의 전철’을 언급한 마이크 펜스 미 부통령을 맹비난하고 미국이 태도를 바꾸지 않으면 정상회담 재고려를 최고지도부에 제기하겠다고 했다. 정상회담을 앞두고 펼치는 의례적인 신경전으로만 보기에는 아슬아슬하고 엄중한 상황이다. 자칫하다가는 비핵화 협상의 판 자체가 깨져버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사태가 이렇게 된 데는 북·미 간 뿌리 깊은 불신이 자리 잡고 있다. 애초 양측은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와 ‘체제 안전보장 및 경제 지원’의 맞교환에 대한 기대감을 갖고 정상회담 개최에 합의했다. 그러나 구체적인 패를 맞춰보는 과정에서 셈법이 다른 것을 확인한 것이다. 북한은 미국이 CVID만 강요할 뿐 반대급부에 대해서는 신뢰할 만한 답을 내놓지 않고 있다고 불만이다. 미국은 북한이 보상에만 관심이 있을 뿐 CVID에는 소극적이라는 의구심을 갖고 있다.

북·미 협상이 성과를 내지 못하면 끔찍한 결과로 이어질 게 뻔하다. 북핵 위기가 고조돼 제한적 북폭론, 코피 작전 등이 거론될 정도로 한반도에 일촉즉발의 전운이 감돌았던 과거로 되돌아간다고 생각하면 아찔하다. 북핵은 주변국의 핵무장론을 촉발시켜 동북아의 군사적 긴장을 극대화할 가능성이 높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지 모른다. 절박감을 갖고 타협점을 찾아내야 한다.

거래가 성공하려면 상대방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이를 수용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초일류 강국이자 절대 강자인 미국이 먼저 마음을 열어야 한다. 북이 원하는 체제 안전보장, 평화협정 체결, 북·미 수교, 경제 지원 등을 수용하고 이를 보장할 구체적인 로드맵을 제시해야만 CVID를 이끌어낼 수 있다. 북한이 핵을 일부 빼돌려 나중에 뒤통수를 치면 어떻게 하느냐고? 구체적인 징후가 없는데도 그걸 예단하는 건 사태 해결을 방해할 뿐이다. 칼자루를 쥐고 있는 건 미국이다. 핵을 포기했는데 미국이 체제 보장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모든 걸 잃게 된다는 북한의 두려움을 해소시켜 줘야 북핵 해법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북한도 핵 포기 없이는 원하는 걸 얻을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핵무기는 가장 강력한 보검이며 후손들이 존엄 높고 행복한 생활을 누릴 수 있는 담보’라고 했지만 핵으로 생존을 도모하겠다는 것은 착각이자 환상일 뿐이다. 핵을 포기하지 않는 한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는 풀리지 않을 것이다. 벼랑 끝 전술로 양보를 받아내려는 기존의 식상한 행태를 되풀이하다가는 불신만 키우고 협상의 문이 닫힐 수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상대가 원하는 걸 줘야 나도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건 상식이다. 한반도 비핵화와 항구적 평화체제 구축은 당사국들의 신뢰 없이는 불가능하다. 북한이 남북 고위급 회담 무기 연기를 통보한 이튿날 청와대는 북·미에 대해 ‘상호 존중’과 ‘역지사지(易地思之)’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상대방 입장에 서서 이해해보려는 자세와 태도가 북·미 모두에게 절실하다.

rdchu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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