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박세환] 억울한 사람들의 나라 기사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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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별세한 구본무 LG그룹 회장은 지난해 10월 사재 1억원을 A상병의 유가족에게 전달했다. A상병은 강원도 철원의 부대로 복귀하다 인근 사격장에서 날아온 유탄에 맞아 숨졌다. 당시 A상병의 아버지는 언론에 이렇게 밝혔다. “누가 쏜 유탄인지 알고 싶지 않습니다. 알게 되면 원망할 것이고, 그 병사 또한 얼마나 큰 자책감과 부담을 느낄지 알기 때문입니다. 그 병사도 나처럼 아들을 군대에 보낸 어떤 부모의 자식 아니겠습니까.” 얼마나 억울했을까. 그럼에도 타인을 배려하는 아버지의 모습에 구 회장도 감동을 받았으리라.

선거철과 청문회 때마다 터지는 고관대작 자녀들의 병역비리 의혹을 보며 문득 궁금해졌다. A상병이 힘 있고 ‘빽’ 있는 집의 자녀였다면. 아마 최전방으로 배치되진 않았을 거다. 좋은 보직을 받아 편하게 군 생활을 마쳤을지도 모른다. 고된 작업을 마치고 위험한 사격장 근처를 지나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불의의 위험은 어디에나 도사린다. 다만 보이지 않는 계층 구조에 따라 ‘억울한 일’을 당할 가능성은 현저히 줄거나 늘어난다.

수습 시절에 봤던 경찰서 민원인 대기실은 억울한 사람들로 가득했다. 말을 걸면 봇물처럼 각자의 사연이 쏟아졌다. 믿었던 동업자가 돈을 들고 사라졌다, 사장님이 은근슬쩍 성추행을 했다, 길거리서 쳐다봤다고 두들겨 맞았다…. 구청이나 시청, 검찰, 법원, 감사원, 청와대, 건설사와 은행 앞은 피켓을 든 사람들로 넘쳐난다. 사시사철 목 놓아 부르는 그네들의 외침과 절절한 탄원서로 참 억울한 이가 많구나 하고 짐작한다. 진위 여부는 봐야겠지만.

사회학자 최태섭은 ‘억울한 사람들의 나라’라는 책에서 우리네 정치·사회적 사건의 바탕에 ‘억울함’이라는 정서가 있다고 분석한다. 정당한 억울함을 알리고, 도움과 인정을 바라는 건 인간의 자연스러운 심리다. 문제는 억울함을 두고 경쟁하는 것이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모두 억울함을 호소하는, 가짜 억울함과 진짜 억울함이 교차하는 현 상황이 진짜 문제라고 책은 주장한다.

특검에 출석하던 최순실이 ‘나는 억울하다’고 외칠 때,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부인 이명희씨가 18가지 갑질 의혹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할 때, 횡령·배임으로 기소된 이중근 부영그룹 회장이 변호사를 통해 억울함을 밝힐 때 가짜 억울함이 발화한다. 아들의 허망한 죽음까지 가슴에 묻는 아버지 앞에서 한낱 먼지와 같이 가벼운 것들이다. ‘억울함은 위험하다. 억울함이 나를 사로잡으면 내 잘못과 앞으로 저지를 잘못까지도 면죄부가 주어진다’는 최태섭의 시각이 정확하다. 억울함까지 갖기엔, 그들은 이미 너무 많이 가졌다.

걱정은 따로 있다. 진짜 억울한 이가 짊어질 마음의 병이다. 세월호 참사 장례식장에서 한 엄마를 봤다. 딸의 영정 앞에 멍하게 서 있었다. 지인으로 보이는 이가 그녀의 어깨를 마구 흔들며 소리쳤다. “제발 울어. 이 마음에 담아서 어쩌려고. 앞으로 살 세월이 그렇게 많은데 좀 소리쳐서 울고, 원망하고, 대통령이든 학교든 어딘가를 향해 욕도 좀 하라”고 했다.

한(恨)이 깊으면 눈물도 마른다. 표출 없는 슬픔은 안에서 곪는다. 한 정신과 의사는 이렇게 조언했다. “청와대 국민청원이든, 국민신문고 홈페이지든, 구청 민원이든, 거리로 나와 시위를 하든 억울함을 드러내야 해요. 안 그러면 자꾸 생각하고, 자책만 하게 돼요. 왜 내가 이렇게 억울한 일을 당하고, 억울하게 살아야만 하는지.”

우리 사회는 이들에게 대화와 연대의 손을 내미는 대신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논리를 펼쳐왔다. 차별과 특권을 고치기보다, 강자의 철칙을 뼛속 깊이 내면화하기 급급했다. 피해자에게 ‘너도 노력해서 억울한 피해를 안 입으면 된다’고 부추기는 해괴한 해결책은 사회 곳곳에서 이상 신호를 보내고 있다. 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의 만행은 억울한 직원들의 폭로와 고발이 모여 세상에 알려졌다. 법조계 언론계 학계 연예계 의료계 전반의 미투 운동도 피해자의 억울함이 폭발한 결과일 터다. 돈과 권력, 지위가 억울함을 잠재우지 못하는 긍정적인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보다 낮은 곳으로 향하도록 법과 제도를 더 손봐야 한다. 무심코 지운 메일을 복구하니 최근 한 중소상인이 권리금 관련 사연을 보내왔다. “기자님. 제가 너무 억울합니다…”라고 쓰여 있다. 청와대 춘추관 앞엔 한 중년 남성이 매일 1인 시위를 한다. 어떤 사연일까. 한번 인사라도 해야겠다.
박세환 정치부 기자 foryou@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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