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김찬희] 리베르타드의 교훈 기사의 사진
리베르타드(Libertad)는 날렵한 뱃머리에 웅장한 돛대 3개를 갖춘 범선(帆船)이다. 매년 아르헨티나 해군사관학교 졸업예정자를 태우고 순항훈련을 한다. 2012년 10월 리베르타드는 가나의 한 항구에 정박했다가 수모를 당했다. NML캐피탈이라는 회사의 신청을 받아들인 가나 법원이 배의 억류를 결정했다. 아르헨티나 정부가 빚을 갚지 않으니 군함이라도 챙기겠다는 협박이 통한 것이다. 선원 280여명은 항공편으로 귀국해야만 했다. 리베르타드는 이듬해 1월 국제해양법재판소의 명령이 있고서야 귀항할 수 있었다.

군함 억류라는 황당한 사건의 배후에는 헤지펀드인 ‘엘리엇 매니지먼트’가 있다. 변호사인 폴 엘리엇 싱어가 1977년 만든 이 회사는 주로 부실기업, 부도 위기 국가에 투자한다. 이어 약점을 집중 공격해 이익을 챙긴다. 이 때문에 ‘썩은 고기’를 뜯어먹는 대머리독수리(Vulture)에 빗대 ‘벌처 펀드’라 불리기도 한다. NML캐피탈은 엘리엇의 계열사다.

아르헨티나 정부와 엘리엇의 악연은 200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아르헨티나는 1000억 달러에 이르는 외화표시 국채의 디폴트(채무불이행)를 선언했다. 엘리엇은 당시 6억3000만 달러어치(액면가 기준)의 아르헨티나 국채를 보유하고 있었다. 아르헨티나 국채 가격이 폭락하자 액면가의 7% 수준에 사들였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2005년 채권자의 75%와 채무 재조정에 합의했다. 액면가의 30% 수준에서 가격을 현실화하고 채무를 탕감한다는 게 주된 내용이었다. 하지만 엘리엇 등 일부 헤지펀드들은 거절했다. 이들은 2010년 아르헨티나 정부가 전체 채권자의 93%와 협상을 마무리 짓자 궁지에 빠졌다. 이때 엘리엇의 장기가 발휘된다.

엘리엇은 달러 표시 아르헨티나 국채의 법 관할권이 미국 뉴욕법원에 있다는 걸 이용해 소송을 건다. 원리금을 받기 전까지 아르헨티나 정부가 신규 채권자에게 이자조차 줄 수 없도록 하는 판결을 받아냈다. 아르헨티나는 다시 디폴트 상황에 몰렸고, 리베르타드 억류도 이 과정에서 발생했다.

2015년 말 아르헨티나 대선에서 마우리시오 마크리가 당선되면서 변수가 생겼다. 경제 활성화를 내건 마크리 대통령은 채무 상환을 위해 15억 달러 규모의 국채를 추가 발행키로 했다. 2016년 3월 엘리엇 등 4개 헤지펀들은 원리금에 법률비용 1억 달러까지 더한 돈을 받아내고 ‘족쇄’를 풀어줬다. 이렇게 해서 엘리엇이 거둔 수익률은 392%나 되는 것으로 알려진다.

엘리엇은 최근 한국 기업을 잇달아 괴롭히고 있다. 2015년 삼성물산 주식 7.12%를 확보한 뒤 제일모직과의 합병에 제동을 걸어 상당한 이익을 챙겼다. 한국 정부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에 부당 개입했다며 7000억원대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투자자·국가 소송(ISD)도 진행 중이다. 또 현대모비스, 현대차, 기아차 지분을 1%가량 보유하고 현대자동차그룹의 지배구조를 흔들고 있다.

엘리엇은 이익을 위해서라면 도덕이나 윤리 따위는 아랑곳 않는 냉혈한이다. 당연히 투자한 기업의 생존, 미래에 관심이 없다. 이쯤이면 서부영화에 등장하는 악당과 견줘도 모자람이 없을 듯하다. 마을 주민을 괴롭히고 죽이며 착취하는 악당 말이다. 그런데 왜 한국 기업들은 ‘한 줌의 지분’으로 공격을 감행하는 엘리엇에 유난히 민감할까.

한국 기업은 허술한 지배구조, 오너 리스크라는 ‘켕기는 구석’을 안고 있다. 경영권 승계 문제, 총수 일가 전횡, 비자금 조성, 분식회계, 배임 등에 늘 노출돼 있다. 이게 빌미를 준다. 고깝게 여기면서도 일부 주주나 기관투자가들이 엘리엇의 주장에 동의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리베르타드가 보여주는 교훈은 하나다. ‘여지’를 주는 순간 ‘모욕’을 당하고 ‘손해’를 본다. ‘켕기는 구석’을 서둘러 해결하고 투기자본에 당당하게 맞서는 게 주주와 기업을 보호하고, 국가경제에 보탬이 되는 길이다.

김찬희 경제부 차장 ch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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