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권혜숙] ‘제2의 한경희’를 기다리며 기사의 사진
2004년, 그러니까 14년 전 인터뷰했을 때는 그녀가 온전한 주인공이 아니었다.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를 한 집에 모시고 사는, 흔치 않은 가족을 소개하는 기사를 위해 두 어르신과 함께했기 때문이다. 그때 그녀는 “시댁을 가족보다 의무로 여기는 여성들이 많아 안타깝다”며 “언젠간 ‘시댁 갈등 없는 좋은 가정 운동본부’를 만들어 볼까 싶다”고 했다. 조용히 웃으며 말을 아끼던 ‘천생 여자’ 같은 이가 사업을 한다는 게 의외로 느껴지기도 했다. 스팀청소기로 생활가전 시장을 평정했던 한경희생활과학 한경희 대표 이야기다.

그 이후 수년간, 더 이상 그녀가 주인공이 아닌 기사는 없었다. 스팀청소기와 후속작인 스팀다리미는 국내에서만 1000만대 가까이 팔렸다. 월스트리트저널과 뉴스위크 같은 외국 언론까지 ‘주목해야 할 여성 경제인’에 한 대표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잇따른 신제품 개발과 외국시장 투자가 엄청난 손실로 이어졌고, 결국 지난해 기업회생절차에 들어갔다. 그새 쏟아졌던 기사처럼 ‘무너진 여성벤처 신화’로 끝나는가 싶었을 즈음, 4개월 만에 법정관리를 조기 졸업했다는 소식과 함께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직접 신제품 스팀다리미를 시연해 보이며 자신의 건재를 알렸다.

“많은 사랑을 받았고, 많은 분들께 실망을 드려 죄인 된 기분으로 살았습니다. 가전제품은 회사가 위험하다는 소문이 돌면 애프터서비스 받기 어려워질까 봐 제품 구입을 꺼리는 경우가 많아지는데 저희는 고객들이 많이 도와주셨어요. ‘한경희가 어렵다던데, 할인 안 된 가격에 제품을 사고 싶다’고 연락을 주신 주부도 있었어요.”

롤러코스터 같은 시간이었을 테다. 하지만 한 번도 포기해야겠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고 한다.

“제가 고집이 세요. 길바닥에 나앉을 때까지 한다는 각오였어요. 자금이 부족해 우리 집과 친정, 시부모님 댁을 담보로 사업을 시작했듯이, 다시 가진 것을 다 쏟아부었습니다.”

‘한경희’라는 이름은 그 자체가 브랜드로, 무혐의로 종결됐지만 지난해 사기 혐의로 고소까지 당하면서 그동안 쌓아왔던 이미지에도 상처가 났다. 하지만 한 대표가 창업한 후 2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지만 아직 그의 ‘워킹맘 발명 성공 스토리’를 능가할 ‘여성 스타 기업인’이 없는 게 사실이다. 하기야, 그러고 보면 요즘 우리가 가장 많이 듣고 보는 여성 기업인이라고는 고작 ‘땅콩과 물컵 자매’가 전부 아니던가.

여성경영인 모임인 세계여성이사협회 한국지부를 주도해 만들었던 한 대표에게 주목할 만한 후배 여성 경영인을 물어봤지만 “준오헤어 강윤선 대표나 공차코리아를 세웠던 김여진 대표처럼 서비스와 유통에는 창업을 한 여성기업인이 꽤 있지만 제조업 쪽에는 워낙 장벽이 많다”며 그 역시 이렇다 할 이름을 대지 못했다.

“우리나라 상장기업의 이사회 내 여성은 전체의 2%뿐이에요. 그중 또 오너 일가 출신이 많고요. 여성은 창업 기회를 포착할 가능성 자체가 훨씬 적죠. 처음 중소기업 지원 프로그램에 신청서를 냈을 때 ‘남편은 어디 가고 바지 사장이 왔냐’는 말도 들었어요. 저는 힘들게 올라왔지만 후배들은 그렇지 않기를 바라요.”

달변은 아니어도 여전히 웃는 낯으로 차분하게 말을 이어가던 한 대표는 10년 후의 꿈은 여성 창업 기업인으로는 최초로 ‘1조 회사’를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지난달 내놓은 신제품 스팀다리미가 홈쇼핑서 ‘완판’을 기록해 일단 재기의 첫 단추는 잘 끼운 셈이다. 전기레인지를 출시하고 렌털 시장에 진출하겠다는 다음 계획이 녹록지 않아 보이지만, 사업이 다시 본궤도에 오른다면 그의 이야기는 더 드라마틱하고 풍성해질 터. 바라건대 10년 후에도 신제품을 내놓으며 웃는 그와 다시 한 번 인터뷰할 수 있기를. 더불어 머지않아 또 다른 여성 창업 성공 스토리를 써내려갈 ‘제2의 한경희’를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권혜숙 문화부장 hskw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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