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장지영] 조선인 전범과 블랙리스트 기사의 사진
1942년 4∼5월 일본은 조선에서 포로감시원을 대대적으로 모집했다. 이때 모집된 조선 청년은 3300여명. 형식은 ‘모집’이었지만 실제는 지역별로 인원을 배정한 후 관리와 순사를 앞세워 협박을 했다는 점에서 ‘징용’과 다르지 않았다. 조선 청년들은 부산의 임시 군속교육대에 끌려가 혹독한 군사훈련을 받은 뒤 동남아시아 각지의 포로수용소로 파견됐다. 일본군 포로가 된 연합국 장병들을 감시하고 통솔하는 게 이들의 역할이었다. 당시 일본군 내에서 이등병보다 아래에 있는 존재였지만 2차 대전이 끝난 뒤 포로 학대의 책임은 이들에게 집중됐다.

연합국은 일본의 전쟁범죄 책임을 묻기 위해 재판을 열었다. 전쟁 수행의 핵심 인물인 A급 전범으로는 겨우 28명이 기소돼 7명에게 사형이 선고됐다. 그리고 전쟁 중 포로 학대, 약탈 등을 저지르거나 상급자의 명령에 의하여 고문과 살인을 저지른 B·C급 전범은 5700명이 기소돼 934명이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런데 B·C급 전범 가운데 148명이 조선인이었다. 이들 중 23명은 교수형에 처해졌고, 125명은 무기 또는 유기징역에 처해졌다. 조선인 148명 중 129명이 바로 포로감시원이었다. 이들은 포로들에게 무리하게 노역을 강요하고 식량과 의약품을 제대로 공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기소됐다. 하지만 가혹한 포로 정책을 입안하고 지시한 것은 일본군이었고, 최말단의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은 명령을 거스를 수 없는 입장이었다. 이 같은 사실을 잘 모르는 연합국 포로들은 일상적으로 자주 대면했던 조선인 포로감시원을 가장 증오했다. 이것은 조선인 포로감시원에 대한 높은 기소율로 이어졌다. 재판에서 제대로 된 변호도 받지 못한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은 일본의 감옥에서 형을 살다가 1950년대 가석방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전범으로 낙인찍힌 이들은 고국에 돌아가지 못했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외국인 취급을 받아 어떤 지원도 받지 못한 채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다 세상을 떴다.

블랙리스트와 관련해 문화체육관광부 산하기관에 대한 예술가들의 분노에 찬 태도를 보면서 전범이 된 조선인 포로감시원이 겹쳐지는 것은 왜일까. 최근 박근혜 정권에서 블랙리스트를 작성하고 실행한 문체부, 국립극단,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이 차례차례 공식적인 대국민 사과 회견을 가졌다. 하지만 이들의 사과에 대해 예술계의 반응은 달랐다.

문체부의 사과에 대해 예술계는 호의적이었다. 반면 한국문화예술위 사과에 대해선 “사과를 받지 않겠다”는 퍼포먼스를 벌이는 등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한국예술인복지재단과 국립극단의 사과에 대해서도 시큰둥했다.

블랙리스트 관련 산하기관에 대한 예술가들의 분노는 당연하다. 다만 철저하게 수직 관계인 문체부와 산하기관의 관계를 볼 때 블랙리스트 실행을 강요한 문체부에 대해 더욱 분노해야 하는 것 아닐까. 문체부는 자신들 역시 청와대 강요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항변한다. 하지만 문화예술계의 블랙리스트 문제는 기본적으로 문체부가 문화예술계를 장악하고 통제하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런데도 새 예술 정책과 문화비전 2030을 보면 이런 문제를 개선하려는 내용은 찾아보기 어렵다. 게다가 현재 문화예술계의 산적한 문제는 그동안 문체부의 잘못된 정책에 따른 것이기도 하다. 또한 이대로라면 앞으로도 문체부의 입김은 막기 어려워 보인다.

조선인 전범들은 ‘동진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평생 일본 정부와 싸웠다. 자신들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다. 무지했다고는 하지만 일본 제국주의의 손발이 되었던 것을 반성하는 한편 일본 정부의 사죄를 줄기차게 요구했다. 그리고 2006년 한국 정부는 국무총리실 ‘일제 강점하 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를 통해 조선인 B·C급 전범자에 대해 전범이 아니라 강제 동원 피해자라고 인정했다. 문체부 산하기관 실무자들도 블랙리스트 문제에 대해 동진회처럼 싸워야 하지 않을까.

장지영 국제부 차장 jyja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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