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김남중] ‘재판거래’와 KTX 여승무원 기사의 사진
유미씨를 처음 만난 건 2008년 여름이었다. 한낮에는 불볕더위와 싸우고 밤에는 노숙자들과 씨름하는 서울역 앞 천막농성장에서 그녀는 28세의 여름을 보내고 있었다. 2004년 KTX 1기 승무원으로 입사해 22개월을 근무했다는 그녀는 당시 29개월째 파업 중이었다. KTX 승무원 유니폼을 입은 유미씨의 청춘은 환했다.

그러나 그 빛은 오래가지 못했다. 1년 후 정규직으로 채용하겠다던 한국철도공사(코레일)의 약속은 휴지조각이 돼버렸다. 비정규직에 간접고용 상태가 계속됐다. 국책사업에 마스코트로 이용된 후 버려진 셈이었다. 노조가 결성됐고 파업이 시작됐고 280여명이 해고됐다.

지난달 30일 서울 양천구 한 아파트 단지 내 커피숍에서 유미씨를 다시 만났다. 10년 만이었다. 38세 유미씨는 딸 하나를 키우는 엄마가 돼 있었다. 그 전날 KTX 해고 여승무원들이 대법원장 면담을 요구하며 대법원 대법정까지 뛰어 들어가는 사건이 있었다. 유미씨의 동기이자 한 살 위 언니인 김승하 KTX열차승무지부장은 대법정에서 “양승태 전 대법관과 재판부가 엉터리 판결을 내렸다” “그 판결로 내 친구가 죽었다”고 울부짖었다.

유미씨는 일을 하느라 대법원에 가진 못했다. 대신 밤에 뉴스를 보면서 계속 눈물만 흘렸다고 한다. 7살짜리 딸은 옆에서 만화 영화를 보자며 칭얼댔다. “애를 안고 시위 현장을 쫓아다녔어요. 우리 애한테 그동안 엄마가 싸우는 모습만 보여줬네요. 유니폼 입고 열차에서 일하는 모습도 보여주고 싶은데.” 그 뉴스를 보면서 10년 전에 만났던 유미씨의 얼굴을 떠올렸다. 2015년 2월 26일 대법원 판결이 그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KTX 해고 여승무원들은 2008년 11월 코레일을 상대로 근로자 지위보전 및 임금지급 소송을 제기했다. 1심 법원은 여승무원들이 코레일 근로자라고 판결했고, 2011년 2심 법원도 코레일의 항소를 기각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3년 반이 지난 후 대법원은 판결을 뒤집어 버렸다.

“며칠 동안 계속 울기만 했어요. 아, 우리 이제 끝났구나, 결국 내 인생을 망쳐버렸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죠.” 당시 여승무원들에겐 1억원 가까운 돈을 토해내야 한다는 압박감도 컸다고 한다. 여승무원들은 1·2심 소송에서 이긴 후 그동안의 임금으로 1인당 8640만원을 지급받았다. 그런데 대법원 판결로 이 돈을 다시 반환해야 될 처지가 된 것이다. 집으로 압류장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그게 다 빚이 된 거예요. 그 빚이 자식이나 가족들한테 갈까 봐 걱정들을 많이 했죠. 이혼을 해야 되나 심각하게 고민하는 친구들도 많았고.” 대법원 판결 후 한 여승무원은 세 살배기 딸을 남겨둔 채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그 언니’ 얘기를 하면서 유미씨의 눈가가 다시 붉어졌다. 그녀는 “남들 하품하는 것처럼 우리는 울면서 살아왔다”고 말했다.

양승태 대법원 시절의 재판 15건이 ‘재판 거래’ 의혹에 휩싸여 있다. 상고법원 도입에 대한 청와대의 지지를 얻어내기 위해 정권에 유리한 재판을 내렸다는 정황이 발견된 것이다. 그중 하나가 KTX 여승무원 판결이었다.

유미씨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KTX 여승무원들이 국가기관에 의해 두 번이나 농락을 당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20대 여승무원들을 상대로 정부는 ‘취업 사기’를 저질렀고, 여기에 맞선 그들의 9년 투쟁을 대법원은 정치적 거래의 대상으로 삼았다. ‘국책사업의 성공을 위해서’ ‘VIP와 BH의 원활한 국정 운영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상고법원의 성공적 입법 추진을 위해서’ ‘노동개혁에 기여하기 위해서’ 여승무원들은 “하품하듯이 울면서” 12년을 보내야 했다. 2006년 2월 25일 저녁 9시30분 부산을 출발해 서울로 올라오는 KTX 100번 열차. 그 열차가 유미씨의 마지막 열차였다. 유미씨는 아직도 승무원으로 복직할 날을 기다리고 있다.

김남중 사회2부 차장 njkim@kmib.co.kr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