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김다은] 4차 산업혁명과 오라클의 예언 기사의 사진
4차 산업혁명이라는 용어는 2016년 다보스 세계경제포럼에서 클라우스 슈밥 교수가 주창하면서 널리 알려졌다. 1차 산업혁명이 증기기관, 2차 산업혁명이 대량생산, 3차 산업혁명이 인터넷 기술로 대변된다면 4차 산업혁명은 빅데이터, 사물인터넷, 사물의 지능화 등 다양한 용어들로 설명된다. 소위 4차 산업혁명은 ‘사람과 사물과 시공간을 초연결하거나 초지능화시켜 산업구조 사회 시스템을 혁신하는 시스템’이다. 이 중 가장 뜨거운 감자는 인공지능(AI)이다.

한국인이 인공지능을 피부로 체감한 사건이 2016년 ‘알파고’가 이세돌 9단을 이긴 것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1997년에 이미 슈퍼컴퓨터 ‘딥블루’가 세계 체스 챔피언을 물리쳤고, 2011년 인공지능 ‘왓슨’이 미국의 인기 퀴즈쇼에서 인간 챔피언을 이기고 우승했다. 그 후 인공지능은 챔피언이 아닌 보다 평범한 모습으로 우리 삶 속으로 파고들었다. 대표적인 것이 AI 스피커다. 사람이 스피커에 대고 “슬픈 음악 틀어줘” “불 꺼줘” 하면 인공지능들은 비서처럼 임무를 수행한다. 심지어 AI 스피커 두 대가 “나는 인간, 너는 로봇”이라며 서로 논쟁을 벌이는 상황이 도래하면서 인간과 인공지능 사이의 새로운 존재 조건과 상황이 예고되고 있다.

인간의 고유 영역이라고 느꼈던 예술도 마찬가지다. 음악 분야에서는 바흐나 모차르트 작곡 스타일을 학습한 로봇들이 이들처럼 작곡을 하고, 로봇들만이 연주하는 로봇 밴드도 이미 세상에 나와 활동 중이다. 영화에서는 ‘로보캅’ ‘터미네이터’ ‘트랜센던스’처럼 내용에서 뿐만 아니라 영화 ‘모건’의 예고편을 만든 ‘왓슨’처럼 제작자로도 활동하고 있다. 미술에서는 네덜란드의 렘브란트 미술관과 델프트 공대가 개발한 인공지능 ‘넥스트 렘브란트’가 렘브란트 작품의 전형적인 표정과 고유한 붓질을 데이터베이스화한 뒤 ‘진짜’ 렘브란트 그림을 그려내고 있다.

문학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미국의 매사추세츠 공과대학 개발팀이 만든 인공지능 쉘리는 소설가다. 인터넷에서 네티즌들이 특정 대상에 대해 이야기하면 쉘리가 이 두세 문장을 매시간 반영해 소설을 써 내려간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2016년 호시신이치상 1차 심사 통과작 ‘컴퓨터가 소설을 쓰는 날’이 인공지능에 의해 쓰였음이 밝혀졌다. 현재 국내에서도 총 상금 1억원을 걸고 ‘인공지능 소설 공모전’이 진행되고 있다. 공모전에서는 작가나 작가 지망생이 아니라 인공지능 알고리즘 개발 역량을 갖춘 이들이 참여하고 있다.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4차 산업혁명이라는 표현이 주창되고 2년이 지난 2018년 초, 다보스 포럼에서 마윈 알리바바 회장은 미래 사회를 이끌어갈 인재 양성에 대해 언급했다. 그것은 기계가 대체할 수 없는, 인간만이 가진 감성인 ‘사랑지수(LQ)’를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신성철 한국과학기술원(KAIST) 총장도 “앞으론 똑똑함을 평가하는 지능지수(IQ)만으로 경쟁력이 높아지는 것이 아니며, 기초과학 연구에 집중한 좌뇌 교육뿐만 아니라 인문·사회 역량을 높이는 우뇌 교육을 균형 있게 이뤄야 한다”고 밝혔다. 이는 문득 영화 ‘매트릭스’에 나오는 예언자 오라클을 떠올리게 만든다. 오라클은 미래를 걱정하면서 좌뇌 중심이 아니라 좌뇌와 우뇌의 균형을 특히 강조했던 것이다. 특이한 것은 4차 산업혁명을 앞두고 이처럼 경제와 과학의 선두주자들이 인간의 감정과 상상력을 특별히 강조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과학과 논리 그리고 수학을 담당하는 좌뇌의 세계가 커질수록 감성이나 직관과 예술적 창의력을 함께 키워줄 인문학적 교육과 LQ를 높일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음, 그러니까 4차 산업혁명의 거대한 도전 앞에서 많은 인문학자들이나 예술가들이 묵묵히 아날로그적인 삶을 계속 사는 이유가 그 기질상 세계의 변화나 첨단 기술에 관심이 없어서만은 아닌 것이다.

김다은 (추계예술대 교수·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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