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박지훈] 지단이 될 수 없다면 기사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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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니스 스타인 로저 페더러는 과거 한 인터뷰에서 이런 질문을 받았다. “아름답다고 느끼는 선수가 있나요?” 페더러는 잠시 고민하다가 3명을 꼽았다. 농구 선수인 마이클 조던과 코비 브라이언트, 그리고 축구 스타 지네딘 지단이었다. “아주 느긋하게 뛰는 선수가 있어요. 지단 같은 선수가 그랬죠. 아주 열심히 뛰지만 힘들게 노력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어요.” 지단의 전성기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만한 답변이었다. 지단은 그라운드를 유유자적 누비면서 예술적인 패스를 선보이곤 했다. 무엇보다 대단한 건 볼을 다루는 감각적인 터치와 우아한 몸놀림이었다. 인터넷을 찾아보면 이런 글까지 만난다. “지단은 날아오는 고려청자도 두 발로 부드럽게 받아낼 만한 선수였다.”

어떤 분야건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이 있다면 그 모습은 축구장의 지단과 비슷할 것이다. 직장인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가 직장 동료들한테서 듣고 싶은 말은 “저 사람은 아주 열심히 뛰지만 힘들게 노력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같은 칭찬일 것이다. 하지만 우린 지단이 될 수 없으니 힘들게 일하면서도 자주 실수를 저질러 무시로 자괴감을 느껴야 한다.

언젠가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가전업체가 무소음 청소기를 만들지 않는 이유에 관해서다. 가전업체들은 소리가 나지 않는 청소기를 얼마든지 만들 수 있지만 그런 제품을 내놓지 않는다. 그 까닭은 소비자들이 무소음 청소기를 탐탁지 않게 여겨서다. 사람들은 청소기가 조용하면 기계의 흡입력도 별로일 것이라고 넘겨짚는다.

생뚱맞은 청소기 얘기를 늘어놓은 건 한국인의 직장생활이 청소기와 비슷해서다. 묵묵하고 우직하게 일한다면 어느 누구도 당신이 거둔 성과와 고충을 알아주지 않는다. 청소기가 그렇듯 시끄럽게 일터를 헤집고 다녀야 인정받고 성공할 수 있는 게 직장인의 삶이다.

그런데 이렇게 사는 건 정말 피곤한 일이다. 그렇잖아도 한국인은 일에 치여 허덕이며 하루하루를 살고 있지 않던가. 한숨 나오게 만드는 통계 중 하나만 소개하자면 이런 게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내놓은 ‘2017 고용동향’ 자료다. 한국 취업자 1인당 연간 평균 노동시간은 2069시간에 달한다. OECD 회원국 평균(1764시간)보다 305시간 많다. 하루 8시간 일한다고 가정하면 회원국 평균보다 매년 38일을 더 일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런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나은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저런 자기계발서로 유명한 스티븐 코비가 내놓은 해법은 이랬다. 일단 사사분면을 그려보자. 가로축은 오른쪽으로 갈수록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을, 세로축은 위로 향할수록 중요한 일을 의미한다. 사사분면을 들여다보면, 모든 일은 네 영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①급하고 중요한 일, ②급하지만 중요하지 않은 일, ③급하진 않지만 중요한 일, ④급하지도, 중요하지도 않은 일.

당연히 ①번을 가장 먼저 해야 하고 ④번은 무시해도 좋다. 문제는 ②번과 ③번이다. 둘 중 무엇에 우선순위를 둘 것인가. 정답은 ③번이라는 게 코비의 답변이다. 중요하지 않은 일에 매달리다 보면, 아무리 시급한 일이어도 결국엔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게 만든다는 것이다. 급하지 않지만 중요한 ③번의 사례를 들자면 부모님께 자주 전화를 드리거나, 자녀와 추억을 쌓거나, 건강관리를 위해 꾸준히 운동을 하는 일을 꼽을 수 있겠다.

내남없이 저런 자세로 직장생활을 한다면 일터의 풍경도 달라질 것이다. 우리는 격무에 시달려야 하는 환경에 반기를 들면서 개인의 삶부터 챙기는 이기적인 모습을 보여야 한다. 이래야 직장 문화가 개선되는 상황이 도래할 수 있다. ‘인간의 조건’이라는 책이 있다. 논픽션 작가 한승태가 꽃게잡이 배나 편의점 등지에 취업해 써 내려간 르포르타주다. 대한민국 워킹푸어의 삶을 그린 세밀화라고 할 수 있는데, 책에는 이런 대목이 등장한다.

“이 괴상망측한 사회가 비틀거리면서도 여전히 굴러갈 수 있는 이유는 수많은 사람들이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음에도 자신이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무실 책장에 꽂아놓고 종종 펼쳐보는 책이 있는데, 제목만으로도 뭉근한 위로가 느껴지는 영국 사회학자 데이비드 프레인의 ‘일하지 않을 권리’다. 지금 당장 지켜야 할 소중한 무언가를 헐어 쓰면서 시간을 보내는 우리에게 저자가 전하려는 메시지는 책에 담긴 이런 문장으로 갈음할 수 있다. “삶은 우리가 관심을 기울일 때 더 많은 보상을 준다.”

박지훈 문화부 기자 lucidfal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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