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남혁상] 김정은의 올 가을 행선지는 기사의 사진
12일 아침 싱가포르 센토사섬의 카펠라 호텔. 19세기 영국 식민지 시절 지어진 유서 깊은 이 호텔의 최고급 객실에서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선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환한 얼굴로 만나 힘차게 악수를 나눈다. 미소를 잃지 않으면서도 악수하는 두 사람의 오른손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다. 감색 양복 차림의 세계에서 가장 힘이 ‘센’ 지도자와 인민복을 입은 은둔의 독재자는 대형 스포츠 이벤트처럼 전 세계로 생중계되는 세기의 담판을 이렇게 시작한다.

두 사람은 호텔 뒤 해변으로 이어지는 산책로도 나란히 걷는다. 서로를 ‘늙다리 미치광이’ ‘뚱뚱한 꼬마’로 부르며 적대감을 드러냈던 관계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친밀해 보인다. 두 정상에게는 싱가포르식의 ‘중립 메뉴’가 오찬으로 제공된다.

이날 저녁 두 사람이 다시 카메라 앞에 선다. 트럼프 대통령은 “빅딜(big deal)이 이뤄졌다. 북한은 핵을 완전히 포기하고, 밝고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아가기로 했다. 평화와 번영의 새로운 시대가 만들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김 위원장도 “미국과의 적대 관계는 끝나고 평화와 대화만 있을 것”이라고 한다. 두 사람은 비핵화와 체제 보장을 골자로 하는 북·미 공동코뮈니케를 발표한다.

한 달 보름 뒤인 7월 27일 판문점 남측 평화의집. 문재인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 김 위원장이 한자리에 모인다. 세 정상은 이 자리에서 한반도에서 65년간 이어졌던 전쟁의 완전한 종식을 선언한다. 상호 불가침 공약이 뒤따른다. 세 정상은 이어 서로 손을 맞잡고 한반도 평화와 번영의 길을 약속한다.

가을이 완연해진 9월 말 미국 뉴욕 맨해튼의 유엔본부. 각국 정상이 모인 유엔총회장에 등장한 김 위원장은 국제사회로의 완전한 편입을 약속한다. 이곳은 2006년 10월 북한의 1차 핵실험 직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 제재 결의 1718호를 비롯한 10차례 제재가 결정됐던 곳이다.

그는 이후 워싱턴DC로 옮겨 백악관 사우스론에서 미국 의장대 사열을 받고 오벌오피스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반갑게 재회한다. 백악관은 로즈가든에서 공동기자회견을 준비한다. 회견장에는 성조기와 인공기가 나란히 걸린다.

위 상황은 역사적인 북·미 정상회담에서 두 정상이 구체적인 비핵화 로드맵을 도출하는 최대한 낙관적인 가상(假想)의 상황을 전제로 한 것이다. 완전한 비핵화와 체제 보장, 경제 지원에 대한 양측의 포괄적 합의가 이뤄지고 타임테이블에 따라 세부 조치가 이행된다면 이런 일이 연내에 벌어지는 게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가상 상황이 현실이 되기 위해선 무엇보다 북한의 진정성이 전제돼야 한다. 북한은 수십년 전부터 한반도 비핵화를 공언해 왔다. 김 위원장은 이를 “선대의 유훈”이라고 했다. 하지만 북한이 비핵화와 관련된 국제사회와의 모든 약속을 파기한 것을 우리는 이미 봐 왔다. 북핵 6자회담 9·19공동성명과 초기 조치를 담은 2·13합의, 10·3합의는 물론 북·미 간 2·29합의 역시 부도수표가 된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북한은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미국 조야의 회의적 시각은 그래서 아직도 유효하다.

그럼에도 이번 회담은 실패 또는 합의 파기라는 결과를 반복하기엔 그 부담이 너무도 크다. 성공적인 회담이 된다면 세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겠지만 반대의 경우 그 파장은 더없이 잔인할 것이다.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다. 북·미 관계 정상화까지는 머나먼 길이지만, 그 길로 가는 표지판이라도 만들어야 할 시기다. 김 위원장이 새 길을 선택한다면 그의 올 가을 행선지는 유엔본부와 백악관, 마러라고 리조트가 될지도 모른다. 아니라면 그는 다시 국제사회의 혹독한 압박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세기의 이벤트 이후 김 위원장의 행선지가 어디가 될지 벌써 궁금해진다.

남혁상 정치부 차장 hsna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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