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송용원] 당연한 것은 없다 기사의 사진
영영 만나지 못할 것 같던 두 나라 지도자가 마주했다. 절대 손을 잡을 수 없을 것 같던 두 정상이 다정히 악수를 한다. 그 광경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짜릿함과 놀라움에 젖은 눈빛으로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각국 기자들로 프레스센터는 인산인해다. 역사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순간이 찾아올 때마다 우리는 존재의 본질에 다다른다. 그것은 다름 아닌 경이로운 은혜다.

은혜란 무엇일까. 내게 찾아온 어떤 것도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진실에 대한 깨달음이다. 어떤 것이 은혜임을 아는 순간, 경이로움에 빠지게 된다. 가슴이 벅차오르고 감사가 밀려온다. 당연하지 않은 은혜는 밑으로 향하는 중력과 달리 우리를 고양시킨다. 무에서 유를 값없이 만들어내는 하나님의 창조는 피조물에게는 당연할 수 없는 경이로운 사건이다. 세상이 존재하고 보존된다는 그 자체가 놀라운 은혜다.

과학신학자 알리스터 맥그라스는 우주의 구조가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도록 정교하게 설계된 것처럼 보일 정도로 심오하다고 말한다. 우주 기본 상수들 중 어느 하나가 조금만 달라지면 별이 하나도 없든지, 모조리 타버리든지, 아니면 바람 빠진 풍선처럼 푹 꺼졌을 것이다. 우주는 당연한 것이 아니라 놀랍게 조율돼 있다는 말이다. 그야말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극장이다.

이 창조세계에서 은혜는 보이는 모든 선물의 토대가 되고, 선물은 보이지 않는 은혜의 실천적 작용이다. 은혜가 추상에서 나와 구체적인 것으로 들어가게 하기 위해 선물이 있다. 만약 행함 없는 믿음이 죽은 것이라면 선물 없는 은혜도 죽은 것이 된다. 그래서 선물 없는 은혜를 주장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좌절될 수 있다.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은혜는 오직 선물로만 전달된다. 이러한 이치를 생생히 간직했던 고대에는 상품을 사고파는 현대와 달리 선물을 주고받는 교환시장이 상상 이상으로 정교했다.

아브라함의 무대를 장식하던 은혜와 선물은 노자의 무대에서는 ‘도’와 ‘덕’으로 등장한다. 그에게 우주의 본질은 도이며, 천지만물은 도에서 탄생한다. 형상도 형체도 없는 도에서 천하가 시작된다. 만물의 어머니인 도는 아무리 써도 다하지 않고 마르지 않는 신비로운 힘이며, 그 도가 드러나면 덕이 된다는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라고 했다. 도와 덕이라는 일반 은총의 나무는 ‘은혜’와 ‘선물’이라는 특별 은총의 나무와 마주한다. 이 또한 당연하지 않은, 그래서 감미로운 만남이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영국 런던에는 주일이면 사람들이 이리저리 거리를 뛰어다녔다. 주일예배를 볼 자리를 찾기 위해서였다. 시내 곳곳 교회마다 자리가 꽉 차 예배드리기가 쉽지 않았다. 지금의 눈으로 보면 진풍경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불과 한 세대 만에 그렇게 뛰어다녔던 사람들은 자취를 감추고, 런던 시내 대부분의 예배당은 텅 비어 버린다. 한 언론인이 연유를 밝히고자 영국을 방문해 여러 신학자, 사회학자, 철학자, 과학자들을 인터뷰했다. 수많은 대화 중에 그의 가슴에 가장 깊이 남은 대답은 가장 연세가 지긋했던 아흔이 넘은 신학자에게 들은 말이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망치로 얻어맞은 듯하게 했던 그 한 마디. 은혜를 당연하게 여기는 순간, 더 이상 은혜가 아닌 것이 되고 만다는 진리. 하늘을 향한 경외감을 잊지 말라는 경고.

그러니 이제부터 우리 모두 그 어떤 것도 당연히 여기지 말자. 칼뱅은 은혜를 호의라고 정의했다. 한반도에 베푸는 하늘의 호의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서는 곤란하다. 은혜의 날에는 원수 같던 사람도 불쌍히 보인다. 이해 안 되던 사람도 이해가 된다. 조촐한 식사도 하늘의 만나가 된다. 이제, 주시는 모든 일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말고 새록새록 감사한 마음을 갖자.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이, 포로 되고 눌린 자에게 자유가 찾아오고, 은혜 위에 은혜가 산맥과 파도처럼 밀려오고 있다.

송용원 은혜와선물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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