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김지방] 판사 리콜 기사의 사진
미국 캘리포니아 샌타클래라 카운티의 고등법원 판사 애런 퍼스키는 지난 5일 재판관직에서 쫓겨났다. 2016년 판결 때문이었다.

브룩 터너라는 스탠퍼드대의 20세 학생이 캠퍼스에서 쓰레기통 뒤에 쓰러져 있는 여성을 범하다 동료 학생들에게 붙잡혔다. 터너는 유망한 수영선수였다. 캠퍼스 성폭행은 징역 14년까지 가능한 중대한 범죄였다. 검사는 단 몇 십분의 면담으로 피해자의 상태를 판정했다. 가해자 터너의 아버지는 힘 있는 변호사를 동원해 피해자의 증언을 앞뒤 맥락 없이 잘라 인용하면서 은근히 피해자의 책임을 부각시켰다. 터너의 변호사들은 재판정에서 피해자가 밤늦게 술에 취해 캠퍼스를 걸을 정도로 무신경했고, 사건 당시에는 의식을 잃어 어떤 상황이었는지 기억조차 못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터너는 피해자 여성의 사생활까지 캐며 흠집을 내려고 했다.

검사는 7년을 구형했다. 카운티 사법부가 권장하는 양형기준은 징역 6개월이었다. 퍼스키 판사는 “젊은 피고인에게 판결이 끼칠 심대한 영향을 고려했다”며 양형기준에 따라 6개월 형을 선고했다. “터너가 수영선수 경력을 이어가 올림픽에 미국 대표선수로 출전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시민들의 항의가 쏟아졌다. 시민배심단 중 한 사람은 퍼스키 판사가 “재판의 모든 과정을 웃음거리로 만들었다”고 항의편지를 보냈다. 카운티 검찰은 퍼스키 판사가 다른 성범죄 사건 재판을 맡지 못하도록 기피신청을 했다. 그 와중에 터너는 3개월 만에 모범수로 석방됐다.

CNN과 AP뉴스는 퍼스키 판사의 과거 판결을 조사했다. 그는 과거에도 양형기준에 맞춰 판결을 했다. 피고인 터너가 전과가 없고 아직 어리다는 점도 판결에 감안됐다. 캘리포니아주 사법부도 퍼스키의 판결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피해자 여성이 가해자 터너를 향해 장문의 편지를 썼다. “언론에선 나를 ‘약물에 취해 의식을 잃은 여성’이라고 불렀다. 나는 파티에서 술에 취해 쓰레기통 뒤에 쓰러진 여성이고, 당신은 미국을 대표하는 명문대학의 수영선수로 유죄 판결을 받기 전까지는 단지 위기에 처한 무고한 남자라는 건 사실이 아니다. 과연 내가 살 가치가 있는지 스스로 의문에 시달리며 지난 1년간 재판정에 서서 모든 수치를 감내해 왔다. 재판정에서 심문을 마친 뒤에는 내 안의 모든 것을 쏟아낸 듯 지쳐 집으로 달려가 휴대폰을 끄고 방문을 잠그고 며칠 동안 아무 말 없이 지냈다. 나의 삶은 분노와 자책과 공허함으로 뒤틀려버렸다.”

그의 편지는 미국의 사법제도가 피해자를 보호하지 못하고 돈과 권력을 가진 자 앞에 무력하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줬다. 법률전문가들은 퍼스키 판사의 판결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지만, 분노한 시민들은 그런 판단이 틀렸다고 생각했다. 스탠퍼드대 로스쿨 미셸도버 교수가 시작한 퍼스키 판사 소환 청원에 100만명이 서명했다. 마침내 지난 5일 주민투표가 실시됐다. 60%의 주민이 퍼스키의 판사 자격 박탈에 찬성했다. 그는 1932년 이후 95년 만에 주민소환으로 자격을 박탈당한 캘리포니아 판사가 됐다.

한국에선 대법원이 맡은 중요 재판을 두고 대법원장을 수행하는 이들이 ‘청와대와 대법원 양측이 윈윈 하는 결과’가 무엇인지 검토한 문건을 작성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들은 야당 국회의원도 재판을 받고 있으니 “대법원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고 계산했다. 그러면서 “(대법원은)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최대한 노력해 왔다”고 자평했다. 과연 대법원이 권력에 민감한 재판을 공정하게 판단했는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대통령을 위한 립서비스용”이라는 말 한마디로, 현직 대법관들은 “재판의 독립에 관해선 어떠한 의혹도 있을 수 없다”는 성명서 한 장으로 모든 의구심이 해소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 한국에 판사 소환제도가 없다는 사실이 아쉽다.

김지방 사회부 차장 fatty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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