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김혜림] 워라밸과 최저임금 기사의 사진
정시퇴근, 야근이 없는 직장생활, 저녁이 있는 삶….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일해야 했던 50, 60대들에겐 꿈같은 단어들이다. ‘워라밸!’ ‘워크 앤드 라이프 밸런스(Work and Life Balance)’, 일과 삶이 균형을 이룬다니 얼마나 멋진가. 근로기준법이 개정돼 300인 이상 사업장은 당장 7월 1일부터 주 52시간만 일하게 되니 워라밸은 꿈이 아니다. 50인 이상 300인 미만 중견기업은 2020년 1월 1일, 50인 미만 중소기업은 2021년 7월 1일부터 주 52시간 근무를 하게 된다. 3년 후면 모든 직장이 워라밸을 누릴 수 있을 듯하다.

그런데 웬일인지 크게 반기지 않는 분위기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가 지난 16∼17일 전국 만 19세 이상 성인 남녀 1015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2명 중 1명 이상이 주 52시간 근무제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응답자의 52.8%가 ‘줄어든 시간만큼 임금도 줄어 오히려 경제에 더 악영향을 줄 것’이라고 답했다. 경제적 여유가 없으면 여가시간은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경험했다. 2004년 주 5일제가 시행됐다. 주말이면 놀러가자며 칭얼대는 아이들을 윽박지를 수밖에 없었던 가장들이 적지 않았다.

주 52시간 근무제가 도입되면 월급이 많지 않은 생산직들이 직격탄을 맞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노동연구원이 내놓은 ‘근로시간 단축에 따른 중소기업 지원 방안’ 보고서에 따르면 52시간 단축 근무가 시행되면 제조업 종사자의 월 평균 수입은 296만3000원에서 257만5000원으로 13.1%나 줄어든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저녁이 있는 삶’보다는 일을 더 해 ‘돈이 있는 삶’을 살 수 있게 해 달라는 호소들이 올라와 있다.

주머니 사정이 팍팍해 워라밸을 반길 수 없는 이들을 울리는 또 하나의 악재가 있었다. 정부가 온갖 생색을 냈던 최저임금 인상이 제 몫을 할 수 없게 관련법이 개악됐다.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은 지난달 28일 국회 본회의에서 최저임금 산입 범위를 확대한 ‘최저임금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지난 5일 국무회의에서는 수정 없이 의결됐다. 매달 지급하는 정기 상여금과 식비, 교통비 같은 복리후생수당을 산입 범위에 포함시켜 실질적인 인상 효과를 반감시켰다. 노동계가 ‘최저임금삭감법’이라고 부를 정도다.

최저 시급 1만원을 목표로 삼았던 정부는 왜 이렇게 쉽게 물러섰을까. 장밋빛 예상이 빗나간 탓이리라. 청와대는 최저임금 인상으로 소득이 늘고 소비가 증가하는 선순환 효과가 나타나면 국가경제 성장과 함께 국민의 삶도 크게 나아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하지만 막상 최저임금이 인상되자 쥐꼬리만큼 늘어난 소득보다 물가가 가파르게 올라 소비는 더욱 움츠러드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최저임금은 월 200만원도 못 받는 노동자들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다. 최저임금 제도가 제 구실을 못 한다면 워라밸은 ‘그림의 떡’이다.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에 시급 7530원은 과한 액수가 아니다. 외려 부끄러운 수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들은 최저시급 인상으로 힘들게 됐다고 아우성이다. 소상공인들은 최저임금의 차등화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2019년 최저임금 인상률을 결정하는 최저임금위원회 전원회의에도 불참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2019년 최저임금 인상률은 오는 28일까지 결정해야 한다. 이들의 하소연은 지금의 경제체제에서 100% 엄살은 아니다.

정부는 원·하청 불공정거래 근절 등 뒤틀린 경제체제를 바로잡아 중소기업에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 임대료와 카드수수료 인하, 프랜차이즈 가맹점 본사의 과도한 로열티 시정 등을 통해 자영업자의 숨통도 틔워주어야 한다.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를 육성하는 것은 경제구조를 단단하게 만드는 일이다. 6·13 지방선거에서 이룬 대승에 취해 문재인정부가 초심을 잃는다면 한국 경제의 내일은 어둡다.

김혜림 논설위원 겸 산업부 선임기자 ms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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