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배병우] 진보, 이제 실력을 보여줘 기사의 사진
6·13 지방선거 다음 날 신문과 방송은 ‘보수의 궤멸’ ‘보수의 몰락’이란 제목으로 뒤덮였다. 보수 참패의 원인으로 시대 흐름을 역행하고 막말로 일관한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의 존재가 빠지지 않는다. 하지만 한국당 대표가 다른 사람이었어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선거는 지난 13일 치러졌지만 결과는 이미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이 열린 지난 4월 27일에 나 있었다고 봐야 한다.

한국 보수의 실체는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에서 일차로 드러났다. 그들이 내세운 자유민주주의는 소수 특권·기득권 세력인 ‘그들만의 리그’의 다른 말이었다. 시장경제는 재벌과 권력이 이권을 주고받는 천민자본주의를 가리키는 단어였다. 한국 보수의 핵심 토대는 뭐니 뭐니 해도 공산주의와 북한에 대한 반대다. 자유민주든 뭐든 곁가지다. 한국 보수주의가 번성해 온 이러한 이유를 잘 설명하는 게 미국 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의 이론이다. 그에 따르면 보수주의는 기존 제도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 대두했을 때 그에 대항하는 논설로 채용된다. 위협이 있는 상황에서만 번성하고 호소력을 갖는 ‘상황적 이데올로기(situational ideology)’다. ‘빨갱이에 대한 공포 만들기’가 한국 보수의 생명줄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토대가 남북 정상회담 날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일거수일투족이 12시간 생중계되면서 한꺼번에 무너졌다.

평생 선거에서 1번(집권 보수여당)만 찍었고 지금도 구속된 박근혜 전 대통령 얘기만 나오면 눈물을 훔친다는 한 후배의 노모가 지난 4월 27일 밤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김정은이가 듣던 거와 달리 예의가 있더라.” 머리에 뿔난 괴물인 줄 알았던 김정은이 예의 바른 젊은이가 된 이날이 한국 보수엔 암흑의 순간이었다.

이제 진보의 날이 왔다. 더불어민주당은 재보궐 선거에서도 11석을 추가해 범여권의 국회 의석은 과반이 됐다. 진보세력이 입법·행정·사법 삼권에 이어 지방권력까지 거머쥐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년 뒤 총선을 석권하자는 얘기가 민주당 내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한데 향후 선거에서는 시험 문항이 완전히 달라지는 게 문제다. 이번 지방선거는 남북관계에 대한 문제 50∼60%, 적폐청산 관련 문제 20∼30%로 구성된 시험이었다. 2020년 총선은 경제 항목이 50∼60%, 북한 비핵화 이행 항목이 20∼30% 정도 될 것이다. 모두 만만치 않은 과제들이다. 우선, 비핵화 선언은 이뤄졌지만 북한 핵무기와 시설에 대한 사찰과 검증이 제대로 이행될지는 미지수다.

최대 난제는 두말할 것 없이 경제다. 살림살이가 나아지고 일자리가 만들어져야 한다. 청년실업도 완화돼야 한다. 이런 것들이 통계로 입증되고 피부에 와 닿아야 한다. 보호무역주의 확산 등으로 대외 환경은 더 나빠지는 가운데서다. 문재인정부가 이걸 할 수 있는가. 지난 1년간 이 정부의 철학이나 성향으로 볼 때 쉽지 않을 것이다. 가장 고약한 건 정부 핵심들의 이념과잉, 근본주의적 성향이다. 가설에 불과한 소득주도성장을 밀어붙이는 과정에서 확연히 드러났다. 구체적인 현실에 바탕을 두고 정책을 입안하고 시행하는 게 아니라 소득주도성장이라는 ‘진리’에 현실을 끼워 맞춘다. ‘최저임금 인상의 긍정적 효과가 90%’라는 대통령 발언이 나오게 된 노동연구원 통계 처리를 둘러싼 논란이 대표적이다. 일자리 창출과 투자의 주체인 기업에 대한 푸대접과 폄하도 놀라울 정도다. 기업이 근로시간 단축제의 문제점을 호소해도 기업은 밀어붙이면 적응할 수밖에 없다는 식이다.

이러한 반(反)기업 정서, 이념과잉을 폐기하지 않으면 경제가 나아질 수 없다. 경제 컨트롤타워의 혼선이 심각한 만큼 경제라인의 인적 쇄신도 필수적이다. 문 대통령은 이렇게 할 결단력이 있는가. 명심할 것은 지방선거에서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는 경제 상황이 악화되면 언제라도 철회될 조건부 성격이라는 점이다. 이번 선거 압승이 온전한 축복인지, 위장된 저주인지는 정부의 결단에 달렸다.

배병우 논설위원 bwba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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