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전정희] 전쟁과 신앙 기사의 사진
1950년 6월 말 조선신학교 학생 맹의순은 6·25전쟁이 발발하자 서울 삼각산으로 숨었다. 스물다섯의 청년. 그는 평양 장대현교회 장로였다가 신앙의 자유를 위해 월남, 서울 남대문교회를 섬기고 있던 아버지의 간곡한 부탁에 그리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형은 학도병으로 끌려가 죽었다. 시집 간 누나는 갑작스럽게 죽었고, 누이를 결핵으로 잃었다. 해방 이듬해 어머니마저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아버지 맹관호는 하나 남은 피붙이를 잃고 싶지 않았다.

전쟁 전까지 맹의순은 행복한 교회청년이었다. 서울역 앞에 교회와 신학교가 있어서 교회와 학교생활을 지척에서 병행했다. 하지만 전쟁으로 수백명의 중고등부 아이들과 인사할 틈도 없이 산속 생활을 해야 했다. 7월 들어 전황이 악화되자 그는 산에서 내려가 경남 진주 출신 친구 이규호(전 문교부 장관)와 평안도와 경북 포항 출신 남학생 둘, 경남 남해 출신 여학생 하나 등 총 5명이 남으로 향했다.

그에게 전쟁은 이념이라는 괴물과의 싸움이었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와 경외하지 않는 자의 전쟁이었다. 그러나 그들 일행은 충북 음성에서 인민군에 잡혀 고난을 당했다. ‘하룻밤 사이에 얼굴 모양이 찌그러져서 알아볼 수가 없이’(이규호 ‘내가 아는 무명의 도’ 중) 매를 맞았다. ‘맹군의 찢어질 듯한 비명이 우리 가슴에 예리하게 파고들어왔다…우리는 모두, 나는 나였지만 너는 너가 아니었다. 우리는 잠시 서로 손을 잡고 가만히 울기만 했다’는 이규호의 초월적 정신의 기록은 한 세대에게 가해진 시대의 고통 정도가 신앙 없이 극복될 수 없었음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들은 꿈보다 구원이 급했다.

그들은 살아남아야 했다. 맹의순은 탈출해 낙동강에 이르렀으나 미군에 붙잡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됐다. 그리고 수용소 환자병동에서 미국 의사 통역을 담당했다. 비록 포로 신분이었으나 미국 의사 덕에 얼마든지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수용되길 원했다. 그는 수용소 내 ‘광야교회’를 세웠다.

1951년 1·4후퇴 직후 남대문교회 배명준 목사 등이 석방 수속을 밟을 때 맹의순은 이렇게 답했다. “이 수용소 안에 이미 교회가 세워졌고 그 교회와 교회 식구들, 환자들 그리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두고서 저 혼자 떠날 수가 없습니다.” 이듬해 8월, 고통 받는 이들과 함께하고자 했던 그는 뇌막염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수용소에서 겪은 전쟁과 신앙을 일기로 남겼다.

전정희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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