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호 칼럼] 망해도 제대로 망해야 다시 살 수 있다 기사의 사진
보수 정치가 망한 건 보수가치·세력을 대표하지 못했기 때문, 이는 정치집단의 존재 이유를 묻게 한다
제대로 망하는 것도 실력… 생계형 정치 자영업자 아닌 정치·공직을 소명으로 인식하는 이들이 보수 중심돼야


영화나 기록 영상을 보면 거대한 콘크리트 건물을 해체하는 장면이 있다. 이거 아주 수준 높고 정교한 기술이다. 고차원의 수학과 물리 화학은 물론 풍향과 풍속까지 변수에 넣어 계산한단다. 그 값을 토대로 건축물의 특정한 지점에 일정한 폭약을 장착·폭파해 폭삭 주저앉힌다. 그렇게 해야 잔해 처리가 쉽고, 이후 처리가 깔끔해지며, 무엇보다 주변 피해를 최소화한다. 그러면 새로 디자인한 명품 건물 재건축을 빨리 잘 진행할 수 있다. 창조를 위한 파괴라고나 할까.

2주 전 지방선거 결과를 보면서 그 장면을 떠올렸다. 선거 결과는 보수가 궤멸상태라는 선고다. 더 적확하게 표현하자면 보수 정치가 망한 것이다. 보수 그 자체는 잘못이 없다. 우리의 보수 정치는 거들먹거릴 줄은 알았지 보수적 가치를 대변할 의지도 능력도 없었다. 보수 정치인들에게서 보수적 가치를 찾는 것은 안타깝지만 어렵다.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왜곡된 보수 정치가 지금까지 연명했던 건 반공과 지역주의, 이를 기반으로 한 기득권 내 정치적 이익 배분 때문이었다. 이런 것들로 어떻게든 버텨왔지만, 시대는 달라졌다. 안으로 점점 심각하게 곪아오던 것이 이번에 선거라는 정치 행위로 공식화한 것뿐이다.

보수 정치가 이렇게까지 망한 이유는 뭘까. 선거 5일 뒤 문재인 대통령이 정확히 짚었다. 문 대통령은 지난 18일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청와대 직원과 공직자들은 유능, 도덕성, (겸손한) 태도, 세 가지를 가지라고. 취임 후 처음으로 청와대 직원 모두가 실시간 화상으로 보게 했으니 상당히 준비한 말이었을 게다. 이 세 가지는 보수 정치인들에게는 아주 아픈 대목이다. 보수 정치는 무능했고, 상대적으로 도덕성이 낮았으며, 국민과 따로 노는 태도를 가졌다. 대통령은 이 덕목만 어느 정도 갖춰도 지금 수준의 보수 정치는 가볍게 제칠 수 있다고 본 것 아닐까. 그들도 한때 폐족이었다. 하지만 지난 10여년 동안 상황을 인정하고 절치부심, 중장기 전술과 전략을 짰다. 시민사회단체로 인적 수혈 네트워크를 갖추고 진지를 구축해놓았다. 물론 문 대통령이 당부한 것과 현 정권이나 진보 세력이 국정을 잘 운영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보수 정치가 앞으로 그런 능력을 갖출 수 있을까.

문 대통령이 유능을 얘기한 건 특별히 눈길을 끈다. 원래 유능함은 보수 진영이 늘 진보보다 우위에 있다고 내심 내세우던 거였다. 도덕적으로, 정치 과정에서 다소 모자람이 있다 하더라도 산업화를 이뤄내고 나라를 안정감 있게 이끌어왔다는 그 유능함 말이다. 그런데 지난 정권에서 보수 정치는 더할 나위 없는 무능을 드러냈다. 전직 대통령이 처한 상황이나 국정 농단 행위들은 보수 정치가 보여준 도덕성과 태도의 현주소다.

보수 정치가 이렇게 처참하게 된 이유는 보수의 가치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아니 애당초 그런 가치가 없었다는 게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책임과 헌신, 희생과 노블레스 오블리주 같은 것들을 찾아볼 수 없다. 가치라는 건 자주 입에 올리면 꼰대 같은 소리가 되지만, 결정적인 순간엔 선택의 기준이 되고 정체성이 된다. 보수 정치가 그런 걸 갖췄었다면, 그래서 보수 내부에서 견제와 균형이 잘 작동했더라면, 이명박정부는 보수 가치를 지닌 실용주의로, 박근혜정부는 품격과 책임 있는 보수로 자리매김했을 수도 있었다. 애당초 진정한 보수 정치가 없었던 게다.

선거 후 벌어지는 보수 정당 내 네 탓 공방은 우리 보수 정치가 붕당 구조임을 여실히 드러낸다. 보수적 가치나 근원적 성찰은 없다. 난파 와중에도 내가, 내 세력이 자리 차지해 그나마 남아 있는 손바닥 권력을 차지하겠다는 것인데 이런 정치 집단은 존재할 이유가 없다. 정치 자영업자들의 모임이다.

보수 정치가 살 길은 보수적 가치를 재정립하는 것이다. 그것은 여의도에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여의도 정치는 그런 가치를 구현해주는 도구일 따름이다. 민주정치 선진국에서 볼 수 있는 싱크 탱크나 정치 학교 등의 활발한 활동이 필요하다. 정치나 공직을 생계 수단이 아닌, 소명(召命)으로 인식하는 젊은이들을 키워야 한다. 당장 다음 선거엔 도움이 안 되겠지만, 그렇지 않고서는 방법이 없다. 그런 토양을 만들기 위해선 지금의 보수 정치가 망해도 제대로 망해야 한다. 잘 망하는 것도 실력이다. 그래야 멋진 새 집을 지을 수 있다.

지금 보수 정당 내에서 나 살겠다고 싸우는 게 어쩌면 ‘제대로 망해가는’ 의미 있는 과정일 수도 있겠다. 더 어이없는 상황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당사자들도 국민들도 이건 도저히 안 되겠구나 생각하면 제대로 된 해체 공법이 나오지 않겠는가.

수석논설위원 mh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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