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전철] 손님과 주인 기사의 사진
독일 유학 시절 어느 가을 오후, 기숙사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방문을 누가 두드렸다. 밖으로 나가니 아프리카 친구 알렉스가 서 있었다. 오래간만에 만나 반가웠다. 포옹 후 그는 나를 찾아온 이유를 진지하게 말했다. 혹시 10유로를 빌려줄 수 있는지. 나는 하필 100유로도 아니고 1000유로도 아닌 10유로인가 반문했다. 그는 당장 오늘 먹을 게 없으며, 또 빵을 사 먹을 돈이 없다는 답을 건넸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상당히 큰 충격을 받았다. 당시 친구는 고향에서 온 부인과 몇 개월 전 태어난 아기가 있었다.

나는 마음이 슬퍼 지갑에 있는 몇 십 유로를 꺼내 친구 손에 쥐어주었다. 그러나 친구는 단지 10유로면 된다고 해 옥신각신 끝에 결국 10유로만 건네주었다. 왜 10유로만 필요하였을까. 어떤 이유 때문이었을까.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은 그것 이상의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는 감사함을 전하며 꼭 갚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 시절 나는 독일이라는 타지의 손님이자 방랑자였다. 하루 먹을 것을 해결하지 못했던 그 친구의 슬픔은 또한 나의 슬픔이었다. 그에게 10유로를 건네준 마음은 채권자의 정체성보다는 이방인의 정체성이었다. 몇 주 후 그는 나를 찾아와 10유로를 되돌려 주었다. 이후 그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우리는 오랜 시간 하이델베르크에서 다시 만날 수 없었다. 친구는 고향으로 멀리 떠났으나 그 처지를 사려 깊게 배려하지 못한 아쉬움은 여전히 쉽게 떠나지 않는다.

나는 배려가 부족해 그가 원하는 것을 제대로 읽지 못했던 마음을 다시 복기했다. 그 친구의 상황을 둘러싼 환대의 여러 태도에 대해 상상했다. 나는 너에게 얼마를 빌려줄 수 있었을까. 나는 내가 먼저 먹고살 것 외의 나머지를 자유롭게 빌려줄 수 있었을까. 혹은 그저 줄 수 있었을까. 나아가 나보다는 오로지 너를 위한 태도는 무엇이었을까. 혹시 내 소유가 아니라 내 생명을 너에게 건네야만 하는 상황이라면 어땠을까. 내 소유는 다시 돌아오지만 심지어 내 생명의 선물은 돌아옴 없는 건네줌뿐일 터인데.

그날 알렉스는 손님이었고 나는 주인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이 낯선 땅의 손님이었다. 언젠가 나 또한 그의 손님이 될 수 있다. 나는 어제 누구의 주인이었으며 오늘은 누군가의 손님이 된다. 우리는 모두 손님을 맞이하거나 손님이 된다. 환대의 주체이거나 환대의 대상이 된다.

이웃에 대한 진정한 환대가 가능할까. 만약 타인에 대한 환대가 나의 권리 안에서만 움직이고 결국 자신을 강화하는 도구가 된다면 이는 환대의 타락이리라. 여기서 이방인에 대한 관대와 배려는 제한적이며 조건부적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적 환대의 정신은 자신의 권리 유지나 확장과는 무관한 무조건적이며 전적인 환대일 것이다. 왜냐하면 신은 심지어 그의 피조물인 인간으로부터 영원히 고통받을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손님 앞에서 좌절하는 우리에게 신의 경지는 실로 불가능한 가능성이다. 하여 철학자 데리다는 환대의 행위가 언제나 시적일 수밖에 없다고 솔직하게 고백한다.

그러나 2013년 대한민국 부산에서 열린 WCC에서 세계교회는 ‘오직 평화(just peace)’의 정신을 그리스도교의 미래 과제로 새롭게 꿈꾸었다. 이제 21세기 평화와 사랑의 비전은 조건과 계약과 거래가 아니라 무조건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너와의 계약과 상호성을 요구하지도 않고, 너의 이름도 묻지 않는 것. 이러한 ‘절대적 환대’로 우리는 ‘권리의 환대’와 결별할 수 있다.

이방인과 타인에게 다가서는 환대 행위는 언제나 문제적이며 시적이다. 우리 모두는 이 여정에서 이 땅의 이방인이라는 점을 겸손하게 깨닫는다. 타인은 주어진 인생의 길을 새롭게 여는 질문이자 신비이다. 그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우리가 진정 하늘의 시민인지 아닌지가 드러나리라. 낯선 이들에 대한 환대의 과제 앞에서 우리는 부족함을 고백하고 기도하며 오늘의 구원을 소망해야 할 것이다.

전철 한신대 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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