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멘 난민 수용에 대한 찬반 떠나 당장 도움 필요한 사람들 도왔죠”

일곱 식구 난민 대가족에게 거처 제공하고 보살핀 하현용 목사

“예멘 난민 수용에 대한 찬반 떠나 당장 도움 필요한 사람들 도왔죠” 기사의 사진
하현용 목사가 지난 25일 제주 한림읍의 한 카페에서 예멘 난민 자말씨 가족과 한집에 살게 된 과정을 얘기하고 있다. 제주=강민석 선임기자

이전이미지다음이미지

제주 한림읍 하현용(떨기나무공동체) 목사 집으로 예멘 난민 자말(43)씨 가족이 들어온 건 지난 11일이었다. 부인과 딸 5명을 포함한 7명의 대가족이었다. 하 목사는 지낼 곳을 찾아 떠돌다 노숙까지 할 상황에 처한 자말씨 가족에게 기꺼이 자신의 집을 내줬다. 한 지붕 두 가족의 동거는 그렇게 시작됐다.

자말씨 가족은 하 목사 집 방 하나를 썼다. 7명이 누워 자기에 충분한 공간이었다. 무슬림이 하루 5번 하는 기도도 이곳에서 했다. 자말씨를 제외한 다른 가족들은 대부분 시간을 이 방에서 보냈다. 이 방에서 벗어나는 데는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했다.

적응 기간이 필요했던 건 하 목사 가정도 마찬가지였다. 자말씨 가족은 라마단 기간 낮과 밤을 바꿔 생활했다. 낮 시간 대부분을 잠으로 보냈고 밤에 활동했다. 너무 다른 생활 패턴에 하루는 하 목사 가족들이 다른 곳에서 자기도 했다.

서로에 대한 무지로 생긴 어려움들은 시간이 지나며 해결됐다. 하 목사는 자말씨와 대화를 많이 나눴다. 그는 예멘에서 농림수산부 장관 비서실 소속 공무원이었다. 졸업은 하지 못했지만 수도 사나의 한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엘리트였다. 그런 그가 고향을 떠난 건 가족의 안전 때문이었다. 내전 중인 예멘에서는 언제 포탄이 날아올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며 살았다. 목숨을 잃은 지인도 많았다. 자말씨는 2012년 예멘을 탈출해 말레이시아로 갔다.

자말씨는 왜 이슬람 국가인 말레이시아를 떠나 한국으로 왔을까. 난민법이 없는 말레이시아에선 평생 불법체류자 신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직장을 구하지도 딸들이 정규 교육을 받을 수도 없었다. 안전과 자녀 교육, 자말씨 가족이 낯선 한국 땅으로 온 이유였다.

자말씨는 수시로 제주출입국외국인청에 전화를 걸어 서울로 갈 수 있는지 물었다. 아무래도 서울이 난민을 위한 교육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정부는 예멘인들의 난민 신청이 급증하자 지난 4월 30일 예멘인을 포함한 모든 난민 신청자의 체류지를 제주도로 제한했다.

두 아이를 둔 하 목사는 자말씨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말씨 가족을 위해 집에서 한국어 수업을 열었다. 다들 더듬거리면서도 열심히 배웠는데 특히 자말씨의 9살 막내딸은 습득 속도가 빨랐다. 그에겐 하 목사의 둘째 아들이 선생님 역할을 했다. 낯가림도 없이 늘 붙어 다니며 알아들을 때까지 같은 말을 반복해줬기 때문이다.

한림읍에서 자말씨 가족은 눈에 띄는 편이 아니었다. 이곳은 읍내에 할랄 푸드를 파는 곳이 있을 정도로 무슬림이 많다. 인도네시아나 베트남 등지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은데도 예멘인에 대한 시선은 유독 곱지 않았다. 인종차별적 발언도 난무했다. 하 목사도 비난에 시달렸다.

하 목사는 “예멘 난민을 두고 잠재적 범죄자나 취업을 위한 위장입국자라고 비난하는 이들이 많다”면서 “하지만 2주 동안 같이 살아 본 자말씨 가족은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우리와 같은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예멘 난민 수용에 찬성 입장도, 반대 입장도 아니지만 그들이 도움을 필요로 해 도왔을 뿐”이라고 덧붙였다.

자말씨 가족은 지난 28일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간 쌓인 정 때문인지 모두 이별을 아쉬워했다. 자말의 12살 넷째 딸은 눈물을 참지 못했다. 하 목사 아내가 그를 껴안자 봇물 터지듯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 자말씨 가족들은 하 목사 가족에게 편지를 남겼다. 편지엔 또박또박한 글씨의 한글로 ‘감사합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제주=황인호 기자 inhovator@kmib.co.kr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