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곡은 시대다] 금속聲에 담은 피난민의 비애… ‘뽕짝 리얼리즘’ 완성하다 기사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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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전쟁은 슬픈 노래를 낳는다. 갑오농민전쟁은 ‘새야 새야 파랑새야’를 낳았고, 제1차 세계대전은 아일랜드의 민요 ‘오, 대니 보이(Oh, Danny Boy)’를 전쟁터에 나간 자식을 둔 모든 미국 부모들의 송가로 만들었다. 우리에겐 드라마 ‘모래시계’의 주제가로 유명한 이오시프 코브존의 ‘백학’도 전사한 아들을 그리는 단장(斷腸)의 모성을 묘사한 노래다.

한국 현대사, 아니 한반도 5000년 역사를 통틀어 봐도 ‘6·25’로 요약되는 한국전쟁만큼 비극적인 역사적 사건은 없다. 몽골의 침입이나 임진왜란, 병자호란 같은 전쟁들이 많은 사상자를 내고 국권을 위기에 빠뜨렸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외침(外侵)’이었을 뿐이다. 가장 굴욕적이라고 할 만한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강제합병도 단기간에 몇백만명 민초의 희생을 요구하지 않았다. 해방은 분단으로 이어지고 분단은 전쟁을 불렀다. 해방→분단→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신생 공화국 대한민국이 겪어야 했던 비극의 3부작이었다.

던져진 해방의 혼란이 아무리 어지러웠다고 해도, 순식간에 이뤄진 분단이 아무리 어처구니없었다고 해도, 1950년의 한국전쟁이 몰고 온 비극 앞에서는 모든 판단이 정지됐다.

한국전쟁은 22만㎢에 불과한 동북아시아 끄트머리의 반도 안에서 1950년부터 3년여 동안 한반도 38선 이북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이를 도운 중화인민공화국, 그리고 38선 이남의 대한민국 및 미국이 주도한 유엔군 사이에 펼쳐진, 지역적으로는 국지전의 성격이 강하지만 내용적으로는 사회주의 진영 대 자본주의 진영의 건곤일척의 힘겨루기였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는 38선과 별반 다를 거 없어 보이는 휴전선을 긋는 것으로 끝난, 양쪽 모두에 치명적인 상처만 입힌 채 마무리된 불행하기 이를 데 없는 전쟁이었다.

전면전이 발발하기 2년 전인 1948년 4월에 이미 남쪽의 문화인들이 작성한 108인 선언엔 민족의 분단이 필연적으로 ‘내쟁(內爭) 같은 국제 전쟁이요 외전(外戰) 같은 동족 전쟁’의 참화를 불러올 것이라고 정확히 적시돼 있다. 하지만 남북의 정치 주도세력이나 미·소 양강은 이와 같은 불길한 예언에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전쟁은 위대한 서사시와 영웅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욕심과 자만으로 탄생해 눈물과 피만 남게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고 외쳤던 ‘전쟁론’의 저자이자 독일 육군의 초석을 놓았던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의 명언은 적어도 1950년 한반도의 상황에선 아무런 쓸모가 없었던 것이다.

어떤 통계도 정확하진 않지만 1129일간의 전투로 인해 남북 양측 사상자는 최대 500만명 정도로 추산되고 1000만명 이상의 이산가족이 만들어졌다. 승자도 패자도 없는, 모두가 패자인 전쟁이었으며 결국 이 순간까지 ‘끝나지 않은 전쟁’이 됐다. 여기에 미군 사망자 3만여명, 중국군 사망자 14만여명을 포함한 제3국 사상자까지 감안한다면 비극의 폭은 좀 더 확장된다.

한국전쟁의 진정한 비극성은 이 전쟁이 전투원보다 비전투원, 즉 민간인의 사상 비율이 전투원보다 더 높은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는 최악의 전쟁이라는 데 있다. 전선은 양측 군대의 대치에 따라 이뤄진 것이 아니라 학살과 보복으로 한반도 전역에, 아니 나아가 한반도 구성원 전체의 가슴속에 굳건하게 새겨졌다. 이 마음속의 전선이 휴전 이후에도 남북 간의 적대성을 끊임없이 재생산하게 된 물질적인 동인이다.

그리고 셀 수도 없는 수많은 노래들이 전쟁과 함께 탄생했다. 이 중에서 시대의 망각을 넘어 오래 살아남은 명곡들을 훑어보면 역시 박시춘이라는 세 글자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식민지 시대에 이미 정상에 올랐던 작곡가 박시춘은 해방 후에도, 그리고 전쟁기에도 여전히 한국의 음악 정서를 지배했다. 어쩌면 이 50년대가 그의 진정한 전성기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는 놀라운 음악적 영감을 토해냈다.

전쟁 발발과 함께 대구로 피난 갔던 박시춘. 그가 육군 정훈국 산하의 군예대에 소집돼 만든 노래 ‘전우야 잘자라’는 전쟁기 그의 걸작 리스트의 첫 페이지를 장식한다. 이 노래는 공식적인 군가라고 볼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대중음악이라고 할 수도 없다. 낙동강 방어선이 위태롭던 그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인천상륙작전 이후 반격해 수도 서울을 수복하고 북진하는 시점에서 탄생한 이 군가는 놀랍게도 단조로 이뤄져 있다. 1절의 서두, 즉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라는 비극적인 묘사로 박시춘은 하마터면 이적행위자로 몰릴 뻔했다.

하지만 이 노래가 세상에 나오면서 이 곡은 대한민국 군인의 영원한 군가가 됐고, 민간에까지 이 노래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어린 소녀들까지 이 노래를 부르며 고무줄놀이를 했을 정도니, 국민 노래였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군가의 내용이나 형식은 거의 획일적이다. 오로지 목적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우야 잘자라’는 ‘달빛 어린 고개에서 마지막 나누어 먹던/ 화랑 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야’ 같은 비장미 넘치는 극적인 형상화와 장엄한 단조 4분의 4박자의 리듬감이 결합해 그 어떤 군가나 전쟁 노래들이 만들어내지 못한 비극적이면서도 단호한 시정을 만들어냈다.

이 노래에 뒤이어 1951년 작사가 유호와 또다시 합을 맞춘 박시춘의 두 번째 걸작은 신세영이 부른 ‘전선야곡’이다. 장훈 감독의 영화 ‘고지전’의 메인 테마로 사용되기도 했던 이 노래는 첨예한 전선 한가운데 선 병사의 내면을 기가 막히게 불러내 전선의 군인과 후방의 가족들의 애끓는 심정을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서정성으로 일궈냈다.

이 두 노래만으로도 한국의 대중음악사는 1950년대 전반을 박시춘에게 기꺼이 할애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두 곡은 다음의 두 걸작을 위한 예고편에 지나지 않았다.

그 곡들은 휴전 협상이 끝난 1953년에 발표된 현인 노래의 ‘굳세어라 금순아’(이 곡의 작사는 박시춘의 친구인 강사랑이다)와 이듬해 남인수를 위해 만들어진 유호 작사의 ‘이별의 부산 정거장’이다. 흥남부두 철수의 긴박한 상황과 난관을 극복하려는 민초의 강인한 생명력을 경쾌한 리듬으로 풀어낸 이 두 노래는 박시춘 음악 생애의 가장 높은 고갱이라고 할 수 있다.

‘신라의 달밤’과 ‘럭키 서울’에서 콤비를 이뤘던 현인의 가창은 그 어느 때보다 강인하고 울림이 깊으며, 이에 뒤질세라 식민지 시대 ‘애수의 소야곡’부터 해방 후의 ‘가거라 삼팔선’까지 인생의 콤비를 이뤄 온 남인수의 절창은 이 가왕의 기나긴 전성기의 정점이라고 할 만하다.

이들 노래는 전쟁이나 군인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전쟁의 현실과 그것을 살아가는 평범한 서민 대중에 포커스를 맞춘다. 영웅화될 수 없는 민초적 삶의 에너지를 영웅화함으로써 대중음악이 시대에 어떤 존립 근거를 지닐 것인가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 명장면이 됐다.

‘굳세어라 금순아’도 그렇지만 전쟁이 끝나 고된 피난살이를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피난민을 화자로 내세운 ‘이별의 부산 정거장’에 이르면 이 작사가와 작곡가는 절제된 노랫말을 구사하면서도 다양하고 풍부하며, 무엇보다도 현실적인 디테일을 조각해낸다.

80년대의 진보적인 대학가 노래운동을 이끈 작곡가 문승현의 말처럼 이 노래들은 민중적인 미학관을 내세우지 않았으면서도 ‘뽕짝 리얼리즘’의 완벽한 형상화를 통해 서민 대중의 미학적 승리를 즉각적으로 획득했던 것이다.

본래 자신이 부를 거라고 생각했던 ‘전선야곡’을 음반사 사장의 판단으로 신세영에게 뺏긴 남인수는 절치부심의 마음으로 ‘이별의 부산 정거장’을 불렀다. 세월은 흘렀지만 가왕의 보컬 컨디션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1949년 ‘가거라 삼팔선’ 이후 이렇다 할 대형 히트곡이 없었던 남인수는 이 노래를 통해 전후의 무너진 음반 시장의 열악한 상황에서도 5만장이 넘는 판매고를 올리는 기염을 토한다. “역시 노래는 남인수”라는 가왕의 명예가 수복되는 지점이기도 했다. 이 노래를 필두로 남인수는 얼마 남지 않은 마지막 생애를 불태우며 거장의 아름다운 황혼을 마음껏 펼쳐 보였다.

남인수의 쟁쟁한 금속성에 담아 박시춘이 전후에 내보인 트로트는 이제 더 이상 애상과 청승에 기댄 식민지 시대의 문법이 아니었다. 그는 트로트 장르의 음악적 한계 안에서도 얼마든지 의지적으로 강인하고 현대적으로 세련된 표현이 가능함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박시춘은 이런 사실을 어떤 순간에도 긴장감을 잃지 않는 완성도 높은 선율을 통해 증명해냈다.

한 인간의 정서로는 감당이 불가능한 전쟁이라는 거대한 숙명의 벽 앞에서 한국의 트로트는 식민지 조선의 이식 문화라는 불행한 지위를 극복하고 한 시대를 대변하는 음악문화로서의 격조를 스스로 완성한 것이다. 최초의 주류 음악 장르로 트로트에 씌워진 왕관이 집요한 자기 관리의 모범을 보인 남인수에게 돌아갔다는 사실은 너무나 당연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가수 남인수
대중음악의 초대 황제… ‘감격시대’ ‘무너진 사랑탑’ 등 히트


경남 진주에서 태어난 남인수(1918∼1962)의 본명은 최창수였다. 하지만 모친의 재혼으로 강문수가 됐다가 1936년 시에론레코드사의 가수로 데뷔하면서 작사가 강사랑이 지어준 남인수라는 예명이 사실상 그의 이름이 됐다.

불우한 소년 시절을 보냈지만 데뷔 이듬해 오케 레코드사로 이적하면서 전성시대를 구가한다. ‘애수의 소야곡’ ‘감격시대’ ‘낙화유수’ ‘가거라 삼팔선’ ‘이별의 부산 정거장’ ‘산유화’ ‘무너진 사랑탑’ 등을 히트시키며 한국 대중음악사의 초대 황제로 군림했다. 무려 1000곡에 달하는 노래를 남겼는데, 녹음의 완성도가 놀랍다. 일제강점기에 친일 군국가요를 부르는 일에 동원돼 부역의 행적을 남긴 것이 옥에 티지만 엔카에 대한 트로트의 자존심을 끌어올린 공적으로 갈음해야 되지 않을까.

강헌<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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