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원재훈] 심야 개표장에서 기사의 사진
자정이 넘은 시간, 허리가 뻐근하고 눈앞이 침침하다. 모두들 묵묵히 투표용지를 가름하고 정리한다. 저녁 7시부터 개표장에 도착한 투표함에서 쏟아져 나온 투표용지는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시민들의 선택과 옹호가 특정 번호 옆에 기표된 투표도장에 나타나 있었다. 간혹 옆자리에서 “아니 이게 뭐냐?”라는 소리가 들린다. 투표용지 모든 번호에 도장을 찍어 놓은 사람, 그것도 모자라 투표용지 전체에 도장을 찍은 사람, 아니면 아무런 표식도 하지 않은 사람, 심지어 찍은 자리를 뭉그러트린 사람도 있었다. 투표용지를 펴기 힘들게 여러 번 구겨서 접어놓은 사람, 종이접기를 한 사람도 있었다. 우리는 개표를 하다가 짜증을 내기도 하고, 웃기도 한다.

참으로 복잡한 민심이었다. 후보에게 단순하게 도장 한 번 찍는데, 다양하게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고 있었다. 도장을 백번 찍은 사람도 있었다. 투표용지가 벌겋게 술 취한 사람의 얼굴 같다. 이것은 무언의 저항일 것이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아 투표용지에 자신의 의견을 보낸다. 어떤 용지는 비명소리처럼 들렸고, 어떤 용지는 욕설처럼 들렸다. 하지만 단정하게 기표하고 가지런하게 용지를 펴서 넣은 유권자들이 제일 많아서 일하기 편했다.

동네에 따라 정치 성향이 확연하게 보인다는 사실도 현장에서 볼 수 있었다. 어떤 투표함을 보고는 이 동네는 전부 2번이라고 옆에 아줌마가 이야기했지만, 내가 골라낸 용지에는 다른 번호들도 많았다. 하지만 이 지역에서 오래 살고 있는 아줌마들은 이사 온 지 일 년밖에 안 된 내 안목을 뛰어넘었다. 그녀의 예언(?)은 적중했다. 나는 비로소 정치인들의 벽과 길을 동시에 보았다. 심야가 되자 유권자들의 마음이 잘 보였다. 그 마음은 짐작할 수 없었던 어떤 사안에 해답을 제시해 주는 하늘의 별과도 같은 것이었다.

재일 정치학자 강상중은 마음이란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지금까지 어떤 인생을 걸어왔는지, ‘그리고, 그래서’ 어떻게 살아갈 건지에 대한 나름의 자기 이해와 밀접하게 맞물려 있다고 했다. 따라서 마음은 인생에 의미를 부여해주는 ‘이야기’를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고. 그가 말한 이야기는 나쓰메 소세키와 토마스 만의 고전적인 소설들이다.

마음이란 산중 수도승들이 갈고닦는 철학적인 대상만은 아니다. 세속에서 마음은 다양한 형태로 변화하면서 개인과 나라를 움직인다. 때론 치사하고 더럽고 유치하기도 하다. 눈에 보이지 않아서인지 설명하기도 애매하다. 하지만 강상중은 마음에 대한 사전적 의미를 확대, 재해석해 주고 있다. 마음은 그 사회의 시스템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의 말대로 한 장의 투표용지를 보면 그가 어떤 인생을 살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고, 어떤 용지는 이야기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예를 들어 백지 용지를 보면, 그가 투표장에 가서 기표도 하지 않고, 묵묵히 백지를 투표함에 넣고 걸어가는 마음의 길이 보이는 것이다. 그 유권자가 어떤 마음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동네로 걸어가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나름 짐작이 된다. 이 짐작이 창조적으로 확신되면 시나 소설이 된다. 작가의 능력에 따라서는 세계의 명작이 되기도 한다. 이야기는 이렇게 나오기도 하는 것이다.

새벽 두 시, 나와 아내를 개표 아르바이트에 소개한 동네 토박이 아주머니가 우리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지지한 정당이 참패를 한 결과를 현장에서 확인하고 얼굴이 조금은 어두웠다. 우리는 동네에 도착했다. 소쩍새 울음소리가 들린다. 서로 수고했다고 인사를 하고 다정하게 헤어졌다. 지금도 선거 후유증은 지속적으로 나타나 정치적인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이제 다음 총선은 이년도 안 남았다. 그건 금방 온다. 정치인에게 선거는 매일매일의 일이다. 승리와 패배는 말 그대로 종이 한 장 차이다. 그때도 총선 개표에 참가해서 지역 주민들과 함께 인간의 마음이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지 지켜볼 생각이다.

원재훈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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