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52시간’ 법대로 했다면 벌써 15년째 시행중 기사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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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누리 없는 주 52시간’ 근무제를 말하는 시대가 드디어 도래했다. 기업들은 천재지변이나 되는 것처럼 엄살을 떨지만, 우리나라는 이미 15년 전부터 법정 근로 40시간, 연장근로 12시간을 포함해 주 52시간만 일하자고 법으로 정해놓은 나라였다. 그런데도 기업들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5일만 일주일로 치고, 주말에도 하루 8시간씩 따로 일을 시키며 주 68시간, 아니 더 많은 시간을 일하게 하는 체제를 지속시켜 왔다.

근로시간 단축이 시기상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새 통계가 나올 때마다 한국인의 연간 총 근로시간이 세계 주요 국가 가운데 가장 길다는 말이 나온 게 오래전이다. 지난해 기준 한국인의 연간 근로시간은 2069시간으로 OECD 회원국 평균(1763시간)보다 306시간 길었다. OECD 회원국 가운데 멕시코(2255시간)에 이은 2위였고, 가입 절차를 밟고 있는 코스타리카(2212시간)를 포함하더라도 세 번째다.

지난해 10월 국회 예산정책처가 발간한 ‘근로시간 단축이 고용, 임금 및 노동생산성에 미치는 영향’ 보고서는 우리나라 근로시간 단축 속도가 OECD 내 3위라고 집계했다. 근로시간 단축을 늦춰야 한다는 취지로 발간된 보고서지만, 역으로 우리 근로자들이 너무 오랜 세월 동안 장시간 근로에 내몰려 왔음을 보여주는 분석이기도 하다. 일본이 연간 총 근로시간을 OECD 평균에 맞추겠다며 팔을 걷어붙인 게 1980년대 후반인데 우리는 30년이 지난 이제야 하고 있는 것이다.

국내 법정 근로시간이 처음 법으로 명시된 건 1953년. 최초 근로기준법은 하루 8시간, 주 48시간을 기준으로 세웠다. 연장근로를 포함한 총 근로가능시간은 주 60시간이었다. 이 법정 근로시간은 1989년이 돼서야 44시간(연장근로 포함 시 60시간)으로 처음 줄었고, 이후 한참 논박이 오가다 40시간(연장근로 포함 시 52시간)으로 단축된 게 2003년부터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미 15년 전부터 주 52시간 근로체제에서 살았던 셈이다.

OECD의 ‘삶의 질’ 보고서엔 ‘직무 압박(Job Strain)’이란 항목이 있다. 관련 집계가 가능한 38개 국가 중 한국이 35위였다. 근로 여건을 초과하는 업무를 수행하는 직장인의 비율을 보여주는 지표로, 이 수치가 한국은 51.6%로 절반을 넘겼다. OECD 평균이 36.9%이고 가장 낮은 나라는 노르웨이로 15.4%다. 미국 28.5%, 프랑스 29.5%, 영국 30.4%, 독일 33.6%, 남아프리카공화국 38.1%, 일본 42.5%로 우리나라보다 직무 압박이 높은 나라는 헝가리(51.7%) 터키(55.2%) 그리스(58.6%)뿐이다.

일본과 비교해도 너무 길다

근로시간 단축을 논할 때 가장 먼저 거론하는 나라가 프랑스다. 실제 시행은 10년 뒤(1946년)였지만 1936년에 주 40시간 근로시간 체제를 법으로 세웠다. 1982년에는 주 39시간으로 법정 근로시간을 한 시간 더 줄였고, 1998년에는 현행인 주 35시간으로까지 단축했다. 주 35시간은 유럽연합(EU) 내에서 가장 짧은 수준이다.

프랑스는 주로 법률을 통해 근로시간을 단축한 국가로, 이 과정에서 노동자 편에 선 좌파 정당들이 주요 역할을 했다.

이처럼 입법기관이 적극 나선 건 낮은 조직률을 가진 노동조합으로는 사용자 측과 교섭을 통한 근로시간 규제가 어려워서였다. 우리나라도 기업이 근로시간을 자율적으로 줄인 사례는 매우 드물다. 회사가 경영난으로 휘청거릴 때에야 근로시간을 줄이는데 이쯤 되면 근로시간 단축보다도 명예퇴직이라는 칼을 먼저 빼어든다. 당연히 남은 사람은 더 많은 일을 해야 했다. 그래도 ‘잘리지’ 않고 살아남은 걸 다행으로 여기는 게 근로자들의 몫이었다. 한 연구논문을 보면 우리나라에 외환위기가 몰아친 1998∼99년 연간 총 근로시간은 106.8시간 증가하면서 이전 8년간 감소한 108시간을 상쇄해버렸다.

프랑스에선 추가근로를 하더라도 최대 하루 10시간을 넘길 수 없다. 1주일에 최대 48시간까지 일을 시킬 수 있지만 12주간 주당 평균 근로시간이 44시간을 넘기지 않도록 조절해야 한다. 예외적으로 하루 12시간, 주당 60시간까지 일을 시킬 수 있지만 이 경우 12주 평균 근로시간이 최대 46시간에 맞춰져야 한다. 추가근로를 시키더라도 매일 10시간이나 12시간씩, 혹은 매주 48시간이나 60시간씩 일을 시킬 수 없다는 뜻이다. 연간 최대 근로가능시간은 1607시간이다. 지난해 OECD 조사 결과 프랑스인이 한 해 동안 일한 시간은 평균 1472시간으로 법적인 연간 최대 근로시간보다 135시간 적었다.

유럽이 너무 이상적이라 한다면 우리와 지리적·사회적·문화적으로 가장 가깝고 비슷한 일본을 살펴보자.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일본이 1950년대 후반 고도 성장기를 타고 경제 강국으로 부상하게 된 배경에는 고강도 장시간 근로가 있었다. 이 근로체제가 80년대 후반 초호황을 누리면서도 지속되자 근로자 계층에선 누적된 불만과 근로시간 단축 요구가 터져 나왔다. 자기계발과 여가에 쓰거나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부족하다는 인식이 확산됐다. 1947년 48시간으로 명시한 법정 근로시간은 1988년 46시간, 1991년 44시간, 1997년 40시간 순으로 빠르게 줄었다. 90년대 들어 연간 총 근로시간이 2000시간 아래로 떨어지자 정부는 1992년 1958시간이었던 연간 총 근로시간을 1999년까지 1800시간으로 줄이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근로시간 단축의 촉진에 관한 임시조치법’을 제정했다. 1800시간을 밑도는 유럽과 미국 등 주요 OECD 국가의 연간 총 근로시간을 기준으로 삼은 것이었다. 이후 근로시간은 빠르게 줄었지만 목표를 달성하지는 못했다. 1999년 당시 연간 총 근로시간은 1848시간이었다. 일본 정부는 해당 법의 일몰 기한을 2006년 3월 31일로 3년 더 늘렸다. 지난해 일본의 연간 총 근로시간은 OECD 평균보다 50시간 적은 1713시간을 기록했다.

기업 자율로는 불가(不可)

프랑스 일본 등 선진국들이 근로시간 단축을 정부 주도로 추진한 건 역시 개별 사업장 차원에서 해결할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들로선 장시간 근로를 결코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 ‘근로시간 단축=이윤 감소’로 바라보는 기업과 기업주들의 사고방식에 따라 근로자들의 탄력적 근로시간제, 연차유급휴가 계획적 활용 등은 요원했던 것이다. 또 ‘장장(長長)시간’ 근로는 초과근로수당 미지급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초과근로가 돈을 받지 못하는 잔업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도 재계는 “주 52시간제를 하면 직원들이 수당을 덜 받게 되니 도입을 재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기업은 중소기업이 크게 타격받을 것이라고 걱정한다. 이 역시 ‘고양이의 쥐 걱정’일 뿐이다.

기업들은 근로시간 단축을 노동생산성 이슈로 막으려 하기도 했다. 우리나라가 노동생산성이 다른 선진국보다 낮으니 근로시간 단축은 경제 성장을 둔화시킬 수 있다는 논리다. 하지만 실제로는 정반대다. 국내 노동생산성이 다른 OECD 국가보다 현저히 낮은 이유가 바로 근로시간이 너무 길어서다. 업무 성과를 일한 시간으로 나눠 노동생산성을 따지니 당연히 근로시간이 길면 생산성은 떨어진다. 근로시간 단축 이후 5년간 시간당 생산성 변화를 보면 한국은 23.1달러(2005년)에서 29.3달러(2010년)로, 일본은 32.3달러(1996년)에서 35.7달러(2001년)로, 프랑스는 49.0달러(1997년)에서 54.7달러(2002년)로 높아졌다. 증가 금액은 각각 6.2달러, 3.4달러, 5.7달러로 한국이 가장 크다. 증가율로 따지면 한국이 26.9%로 일본(10.5%)과 프랑스(11.6%)보다 높다. 우리나라의 법정 근로시간을 더 줄일 여지가 다른 나라보다 훨씬 크다는 걸 의미다. 생산성을 늘리려면 근로시간부터 줄여야 한다.

심지어 우리 기업들은 근로시간을 줄이는 대신 점점 더 많은 일감을 던지며 근로 강도를 높일 개연성이 다분하다. 일 시킬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드니 업무 강도를 훌쩍 높일 것이란 얘기다. 고용을 늘리기보다 근로자 수당을 줄이거나 이 시간, 저 시간을 근로시간에서 빼려는 꼼수도 속출하고 있다.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일하는 사이 근로자가 자신만의 시간을 갖는다 해도 업무 지시에 따라야 하는 상태면 모두 근로시간”이라며 “주 52시간을 넘겨 일을 시키면 당연히 수당을 지급해야 하지만 수당 줬다고 사업주가 처벌받지 않는 건 아니다”고 설명했다.

강창욱 기자 kcw@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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