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승림의 인사이드 아웃] 이방인에 관대함, 베를린 필을 만들다 기사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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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음악이 활성화된 도시를 꼽을 때 삼는 기준 중 하나가 음악가 인구, 그중에서도 직업 연주자의 거주 규모다. 대학이나 교육기관에 학생 혹은 교수로 소속돼 있는 것이 아니라면 음악가들은 굳이 특정 지역에 정착할 필요가 없다. 그런 자유인들이 많이 모여드는 곳은 연주를 위한 이동이 편한 교통의 요지이거나 직업적 수요 즉 도시 안에서 음악가들의 예술적 활동이 활발하고, 서로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는 네트워크와 그들의 활동을 뒷받침할 인프라가 발전된 곳을 의미한다. 예술가들은 각 지역의 정치 및 사회 정책과 경제적 상황 등 여러 예술 외적 요소들을 고려해 더 나은 도시로 철새처럼 이동해왔다.

최근 음악가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 있는 도시는 바로 독일 베를린이다. 이는 해외 유명 연주자는 물론 조성진, 김선욱, 임동혁 등 한국의 젊은 음악가들이 최근 이곳으로 속속 거처를 옮긴 것만 보아도 가늠할 수 있다. 세계 최강의 오케스트라로 군림하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30개국의 다국적 악단인 것 또한 이 도시의 코스모폴리탄적 분위기를 보여준다.

이 도시의 대표적인 오페라극장인 베를린 슈타츠오퍼는 최근 한국인 성악가인 베이스 연광철에게 최고의 장인 가수에게 부여하는 ‘캄머쟁어(Kammersaenger·궁정가수)’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또한 이 극장의 상주 악단인 베를린 슈타츠카펠레는 한국인 바이올리니스트 이지윤을 최초의 여성 악장으로 임명했다. 이처럼 세계를 주름잡는 공연장과 악단들에 한국인 음악가들이 진출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의 실력과 더불어 비교적 쉽게 발급되는 예술인 비자 정책 덕분이다.

이방인을 대하는 베를린의 관대함은 도시의 태동에서부터 비롯됐다. 18세기 처음 프로이센 왕국의 수도로 격상되자마자 베를린은 계몽주의에 입각한 관용 정신 아래 이방인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프랑스에서 추방된 신교도들, 망명한 칼뱅 및 루터교 난민들, 가톨릭교도들은 말할 것도 없었으며 당시 유럽에서 가장 천대받던 유대인들도 이 도시에서는 ‘시민’으로 인정받았다.

난민을 수용한 이유는 물론 희박한 인구를 채우기 위한 실용적인 면이 있었지만 이 정책은 결과적으로는 프로이센의 코스모폴리탄적 성격을 형성하는데 공헌했으며, 나아가 산업 진흥과 국력 증강을 가져왔다. 또한 음악과 예술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작곡가 펠릭스 멘델스존의 조부 모제스는 젊은 시절 베를린으로 이주한 망명 유대인으로, 그가 가진 고도의 교양과 지성은 베를린에 최고의 지식인들이 모이게 하는 자기장 같은 역할을 했다. 비슷한 시기 베를린에서 음악 출판업을 활성화시킨 슐레징거 역시 망명 유대인으로, 그의 손에 의해 베토벤과 리스트, 쇼팽 등의 악보들이 출판돼 유럽 전역에 널리 전파됐다.

이처럼 베를린이 모든 인종에게 문호를 개방했을 때 막힘없는 발전을 이루었던 반면 나치 시대처럼 하나의 민족과 인종주의를 고수했을 때는 유례없는 역사적 비극이 찾아왔다. 그동안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지속적으로 난민 수용정책을 고수해왔던 것은 바로 이런 역사의 가르침 때문이었다. 덕분에 ‘난민의 어머니’라 불리던 그녀였지만, 결국 그 난민 정책이 가져온 정치적 갈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난민 송환 정책을 일부 수용하며 한발 물러섰다.

오랜 이민의 역사를 가진 나라조차도 이방인과의 공존은 여전히 어려운 숙제인 모양이다. 500여명의 예멘 난민 때문에 제주도가 혼란과 갈등의 중심에 섰다. 전 세계가 공유하던 난민 사태에 오랫동안 남의 일처럼 뒷짐지고 관망만 하던 정부가 이제는 나서야 할 때다. 유럽연합(EU)의 중심국 독일에게도 어려운 이 숙제를 제주도에게만 맡기는 것은 가혹한 처사다.

<음악 칼럼니스트·문화정책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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