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박재찬] 금융 약자들을 위한 변명 기사의 사진
대학 새내기 정민아(가명·여)씨는 올 초 ‘인생의 쓴맛’을 제대로 봤다. 형편이 여의치 않아 학자금 대출을 알아보다가 대출 사기 피해자가 되고 말았다. 수입이 전무한 그가 식당 일을 하는 것처럼 서류를 꾸며 은행 대출 심사를 통과하도록 하는 수법에 당했다. 정씨는 600만원을 날렸고, 돈을 챙긴 A씨와는 더 이상 연락이 닿지 않았다. 뒤늦게 경찰에 신고한 정씨는 신용불량자가 되지 않기 위해 아르바이트로 돈을 갚고 있다.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 1∼4월 접수된 보이스피싱(전화금융사기) 피해 유형 가운데 ‘대출사기’가 전체의 81%(9066건)로 가장 많았다. 고금리에서 저금리로 갈아타는 대환대출을 해준다거나 신용등급을 높여준다는 수법 등이다.

대출사기에 휘말리는 데는 복잡한 이유가 없다. 살림살이가 쪼들려 돈을 빌려야겠고, 되도록 대출 금리를 조금이라도 낮춰 보려고 발버둥치다 올무에 걸리는 경우가 많다. “고객님이 원하는 금리에 맞춰 줄 수 있다”는 식으로 꼬드기는 사기꾼들의 감언이설에서 짐작할 수 있다.

사정이 절박한 대출자의 입장에서 볼 때 최근 불거진 은행들의 대출금리 조작 논란 사태는 분노를 자아낸다. 가산금리를 부당하게 올려 받아낸 건수가 1만건이 훌쩍 넘는 지방은행 사례만 보면 실수보다는 ‘조작’에 심증이 굳어진다. 관련 보도를 접하고 다루면서 기업 윤리와 경제 정의가 뭔지 생각해보게 만든다.

건강한 자본주의 사회는 경제 정의가 실현되는 사회다. 이를 위한 정책 수단으로는 공정거래, 소비자 보호 등이 꼽힌다. 정부의 중요한 책무다. 또한 기업은 본래 목적인 이윤 추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도덕적 책임, 즉 기업 윤리 준수가 빼놓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번 대출금리 논란 사태를 바라보는 소비자 입장에선 실망스러울 뿐이다. 정책을 만들고 은행을 감독하는 금융 당국은 4개월 동안 조사를 벌이고도 문제가 된 은행 명단을 공개하지 않았다. 일부 은행들은 부당하게 더 받아낸 이자를 피해자들에게 돌려주겠다면서 부랴부랴 자체 환급 절차에 들어갔다. 법적 문제 소지를 미리 차단하려는 눈치 빠른 행태라는 걸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과연 소비자들을 위해 정직하고 책임 있는 행동을 보였다고 생각할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대학 새내기 정씨에게 대출사기 덫을 놓은 A씨 나이는 25세다. 그는 일당과 함께 금융권에서 돈 빌리기가 쉽지 않은 비슷한 또래의 대학생과 사회초년생, 무직자 등을 먹잇감으로 삼았다. 이들 부류가 ‘금융 약자’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금융 약자는 도처에 널려 있다. 이제 막 직장·결혼 생활을 시작하면서 전·월세라도 얻어 보려는 이들, 여러 해를 기다려 내집 장만의 꿈을 이루는 이들 대부분은 은행 대출 창구를 찾아야 한다. 빚을 갚을 때까지 그들 모두 금융 약자나 마찬가지다.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는 기업이나 공공기관 같은 특정 조직이나 단체만의 문제는 아니다. 막다른 골목에 처한 평범한 이들도 그릇된 판단과 선택을 할 수 있다. 보이스피싱 대출사기에서 현금 운반책 등으로 가담했다가 적발된 이들 중에는 20대가 많다. ‘고액 알바’ 광고를 보고 무심코 뛰어든 것이다. 마땅한 일자리는 없고, 뭐라도 해야 하는 상황에서 ‘해도 되는 일인가’ 의심은 하면서도 발을 빼지 못한다. 사회 경제적 빈부 격차가 커지고 사회적 불안감이 커질 때 더욱 그렇다. 그럴 때일수록 정부 역할이 중요하다.

청와대가 경제·일자리수석을 바꾸면서 ‘청와대 2기’ 진용을 갖췄다. 정태호 신임 일자리수석은 “속도를 내는 것, 성과를 내는 것, 정책을 국민이 체감하는 것”을 기조로 삼았다. 빨리 가고 서둘러 열매를 맺느라 곳곳에서 신음하는 경제적 약자들을 못 챙기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경제가 뭔가.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하는 것(경세제민)이다.

박재찬 경제부 차장 jeep@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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