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하주원] 과감한 시도 기사의 사진
명절에 여자는 하루 종일 음식만 만들고 막상 제사 때는 절을 하지도 못하는 집안에서 자라났다. 제사 때 여자도 절을 같이 하는 게 옳다며 아버지가 나에게 절을 시켰다가 친척 어른들에게 욕을 먹은 기억이 난다. 내가 공부나 행동을 잘해봤자 친척들에게 돌아오는 말은 ‘네가 아들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였다. 고등학교에서 같은 반 남학생이 우수작으로 뽑혀 교탁에서 읽은 논술문의 주제는 ‘여자는 직업을 갖지 말고 엄마의 역할만 하는 것이 좋습니다’였다. 대학이나 직장에서 목격한 성폭행과 성추행은 또 얼마나 많았나. 피해자가 원하지 않아 가해자를 신고하지 못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1960년대만 해도 여성에 대한 폭력을 웃어넘길 장면 정도로 묘사한 광고가 있었다. 인류의 긴 역사에서 여성이 남성과 같은 인격체로 존중 받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는다. 앞으로는 달라야 한다. 여성은 차별 받거나 역사에서 당연하다고 여겼던 언어적, 신체적, 성적 폭력의 희생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생물학적 차이(sex)를 인정하되, 사회적으로 동등하게 대우받으며 같은 권리를 지니고(gender) 살아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당한 만큼 반대 성별에게 갚아줘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랜 당연함을 깨는 것은 어렵다. 때로는 프랑스 혁명처럼 급진적이고 과감한 시도가 필요했다. 노동자가 기계와 같던 환경과 인권이 개선된 것은 전태일 열사 같은 사람의 희생이 큰 역할을 했다. 전태일 열사는 사실 폐렴에 걸렸다고 해고된 여성 노동자를 돕다가 자신도 해고되었는데 마지막 그 과감한 시도가 결국 스스로의 생명을 잃게 해서 개인적으로는 안타깝다. 생명은 어쨌든 소중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인의 자살을 비꼬는 표현을 쓰거나, 대통령 집안의 글자를 비꼬아 공격하는 것이 진정으로 모든 인간의 권리를 존중하자는 페미니즘의 정신이 맞는지 의문이다. 이제까지 남자들이 한 여성혐오는 훨씬 심하니까 이 정도는 괜찮다는 생각은 또 다른 반작용을 낳고 결국 싸움만 계속될 뿐이다.

하주원(의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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