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현의 티 테이블] 비닐 한 장, 사탕 한 개 기사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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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장마가 시작되던 어느 날이었다. 서울 외곽에 사는 50대 주부 S씨는 아침부터 장대비가 쏟아지자 한숨부터 쉬었다. 홀로 사시는 여든이 넘은 시아버지가 이사 비용을 아끼겠다며 포장이사가 아닌 일반이사를 고집했기 때문이다. 짐이 많아 힘들다고 투덜대는 이삿짐센터 인부들에게 시아버지 몰래 추가 비용을 주어야 했고, 부족한 일꾼 수만큼 온 가족이 출동해 이삿짐을 싸고 날라야 했다. 돈은 돈대로 들고, 힘은 힘대로 들었다. 빗물인지 땀인지 구분을 못 할 정도로 온몸이 젖어 한기가 느껴졌다. 그때 일손을 돕던 딸아이가 얇은 비닐 우의를 내밀었다. 비닐 한 장일 뿐인데 입으니 따뜻했다. 마음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이사가 마무리될 무렵 시아버지는 저혈당으로 힘들어하는 남편에게 사탕 하나를 내밀었다. 남편은 사탕 하나에 기운을 회복했다. S씨는 “비 오는 날 이사는 분명 화가 나고 힘들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힘들었던 기억보다 비닐 우의 한 장의 따뜻함과 사탕 한 알의 위로가 더 기억에 남아요”라고 말했다.

신학자 마르틴 부버는 “기억한다는 것이 바로 산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인간은 기억하는 존재다. 슬픔과 기쁨, 비탄과 감격, 분노와 사랑, 후회와 위로 등의 기억들이 삶의 조각보를 직조한다. 인간의 마음을 탐구하는 심리학에서 기억만큼 중요한 연구 분야가 또 있을까. 이스라엘 심리학자 다니엘 캐너만 교수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경험 자아(experiencing self)’와 ‘기억 자아(remembering self)’라는 뚜렷이 구분되는 두 존재가 있다. 경험 자아는 현재 내가 경험하는 것을 느끼는 자아다. 경험 자아는 지금 벌어지는 기쁜 일이나 쾌락을 즐기고 반대로 고통이나 괴로움을 피하려 한다. 기억 자아는 자신의 경험에 대해 끊임없이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스토리텔링을 하는 자아이다. 그런데 두 자아의 판단은 대체로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캐너만 교수 이론의 핵심이다.

미래에 대한 예측과 그에 따른 의사결정 등은 전적으로 기억 자아에 의존해 이뤄진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더 중요한 것은 기억 자아이다. 기억 자아는 기억을 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는 특성이 있다.

우리에겐 과거를 바꿀 수 있는 힘은 없지만 과거가 현재에 미치는 영향력은 바꿀 수 있다. 추억에는 좋은 기억도 있고 나쁜 기억도 있다. 좋았던 기억은 추억하면 할수록 과거가 의미 있고 자신이 좀 더 소중한 사람처럼 느껴진다. 나이가 들면 미래에 대한 희망을 이야기할 때보다 과거를 반추할 때가 많다. 지난날의 실수를 자책하기보다 남아 있는 시간을 생각해야 한다. 이때 비록 힘겨운 지난 시간을 보냈다 해도, 긍정적인 시각으로 지난 삶을 평가하면 자긍심이 생기고 앞으로 남은 시간을 힘차게 계획할 수 있다.

작은 것에도 행복을 느낄 수 있는 ‘행복 근육’을 만들어야 한다. 몸의 근육을 만들기 위해 불필요한 지방을 줄이면서 근력운동을 하는 것이 중요하듯 마음에 행복 근육을 만들려면 마음에 쌓인 묵은 감정들을 잘 비워주고 좋은 감정으로 채워주어야 한다.

행복을 느끼는 순간은 사람마다 다르다. 긍정심리학의 창시자 마틴 셀리그만 박사는 “우리가 가장 잘하는 일을 할 때 느끼는 행복이야말로 가장 완전한 행복”이라고 말한다. 무언가에 ‘몰입’하면서 느끼는 만족감이 육체적 쾌락보다 더 오래 지속된다고 한다. 그것은 마음의 은행에 행복이 쌓여가는 것과 같다. 행복은 일에서의 성공, 일확천금, 권력이나 명성에서 느껴지는 거창한 것이 아니다. 행복은 가족과 공동체,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 사람에 대한 신뢰, 스트레스가 적은 출퇴근 환경처럼 단순한 것이다. 사소한 환경 속에 행복을 느끼는 것, 즉 작은 깨달음이 삶을 풍요롭게 만든다.

행복하게 살기 위해 아등바등 애쓰는 것보다 ‘앞으로 더 나아질 것’이라고 기대하는 편이 더 낫다. 부유하지만 형편이 더 나아질 거라고 기대하지 않는 사람보다 소박한 삶을 살지만 앞으로 더 나아질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 더 행복하다. 행복이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삶의 조건을 내가 어떻게 바라보느냐, 인생의 소소한 기쁨을 느낄 수 있느냐 없느냐에 좌우된다. 지금의 삶이 어렵고 힘이 들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 삶 가운데 행하셨던 일들을 기억하고 산다면 두려움은 안개처럼 사라질 것이다. 하나님은 “과거에 내가 네게 했던 일을 기억하라”고 처방하신다(시 56:8∼11).

이지현 종교2부 선임기자 jeeh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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