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송용원] 3할이면 충분히 행복하다 기사의 사진
지금 누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일까. 사람들은 미국 메이저 리그에서 48경기 연속 출루라는 아시아 신기록을 세우며 올스타로 선정된 추신수 선수를 떠올릴 것이다. 한국 축구 역사상 제일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일까. 아마도 세계 최강 독일을 상대로 믿기 힘든 골을 연거푸 넣던 후반 종료 시간이리라. 이처럼 인간의 행복이란 번영과 성공에 직결된다. 구약 시편에서 말하는 행복도 철을 따라 맺히던 신선한 과실, 만발한 꽃과 잎사귀에 있는 듯하다. 행복의 일차적 속성이 기쁨, 충만, 만족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행복은 인생의 가장 높은 가치가 될 수는 없다. 기쁨, 충만, 만족은 그 자체를 추구하며 얻어지는 가치가 아닌 까닭이다. 따라서 성경 어디에도 행복을 추구하는 자들은 복이 있다든지, 행복을 따라간 사람들은 복이 있다와 같은 표현은 등장하지 않는다. 행복은 행복 자체를 추구하는 방식으로 얻어질 수 없어서다.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행복을 담는 양말은 번영과 성공이라는 털실로 짜여 있지 않다. 어찌 보면 이는 다행스럽다. 만약 번영과 성공만이 행복의 재료라면 행복은 인류의 극소수만 누리거나 결국 아무도 누리지 못하는 신기루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고맙게도 행복의 양말에는 더 굵고 견고한 옳음과 바름이라는 털실이 있다. ‘곧고 똑바르다’는 행복의 더 깊은 어원이다. 결국 성공과 번영을 추구하며 행복을 찾아가면 될 것 같지만, 하나님이 인간에게 보여주신 길을 똑바로 걸어가는 것 자체가 행복임을 나중에야 깨닫는 게 다반사다. 그래서 심리학자이자 상담가인 래리 크랩은 행복이란 좁은 길을 걷는 것, 더 큰 이야기 안에 사는 것, 더 나은 사랑을 위한 싸움에 임하는 제자도의 삶에서만 찾아진다고 털어놓는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행복을 찾기 위해 시간과 열정을 번영의 뜨개질에만 쏟아붓는다. 지금보다 더 똑똑해지면, 외모가 더 나아지면,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주변인들에게 인정받으면 행복해지지 않을까, 라고 생각한다. 행복의 깊은 뜨개질을 경험하지 못한 까닭이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그런 것으로 인간이 행복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오히려 더 많이 배우고 재능이 많아질수록 경쟁과 소유에 짓눌려 행복에 대해 냉소적이 돼 가는 것을. 국민소득은 올라가고 기술은 고도화되고 SNS 접속과 상품은 켜켜이 쌓이고 민주주의를 만끽하고 도시의 마천루는 끝없이 올라가는데 마음들이 예전만큼 정답지가 않다.

시편은 인간이 ‘시냇가에 심은 나무’만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행복하다고 노래한다. 어찌 사시사철 충만하고 번성할 수 있겠는가. 사계절 내내 열매 맺는 나무란 없다. 아무리 훌륭한 야구 선수도 3할이면 대단한 것이다. 결국 7할은 출루하지 못한다. 내놓는 작품마다 흥행하는 감독은 없다. 그래야 행복한 것도 아니다. 행복은 외적 소유의 극대화에서 오지 않는다. 행복은 자기 존재의 뿌리를 내려야 할 시냇가에 연결되어 있는가에 달려 있다. 그래서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세상 지식의 열매가 많은 데서 행복이 오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시냇가인 하나님을 알게 되면 거기서 최고의 행복이 밀려온다고 말했다.

크로아티아 출신 신학자 미로슬라브 볼프는 세계화된 오늘날 지구에서 종교는 어떤 의미를 갖는지 고심하며 두 가지 번영을 비교했다. 하나는 잘 사는 인생, 잘 풀리는 인생, 기분 좋은 인생을 나타내는 ‘번영(prosperity)’이고, 다른 하나는 좋은 인생, 가치 있는 인생을 나타내는 ‘번영(flourishing)’이다. 누가 행복한 사람일까. 인류의 미래를 위해 선택할 수 있는 대안적 삶은 어떤 것일까. 암으로 병든 노구를 이끌면서도 세속주의에 흠뻑 젖은 서구의 젊은이들 앞에 울려 퍼졌던 프란시스 셰퍼의 고백이 떠오른다. “그대가 만일 행복을 따라간다면 그대는 영원히 행복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대가 만일 거룩을 따라간다면 행복은 저절로 그대 뒤를 따라올 것입니다.”

송용원 은혜와선물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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