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장윤재] 수문 앞에서 기사의 사진
구약성서 느헤미야 8장은 예루살렘 성의 수문 앞에서 일어난 놀라운 사건을 전해주고 있다. 때는 예수님 오시기 약 450년 전이다. 각자 자기의 성읍에 흩어져 살던 이스라엘 백성이 모두 예루살렘 성의 수문 앞에 나아와 일곱 밤, 일곱 날이나 초막을 짓고 대 신앙집회를 열었던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은 극심한 위기의 상황이었다. 하나님은 출애굽의 은총으로 새 나라를 세워주셨건만 공의를 잃어버린 이스라엘은 기원전 586년에 바벨론에 의해 멸망해 다시 포로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바벨론이 망하고 새로운 제국 페르시아가 들어섰을 때 그들은 해방되어 고국으로 돌아와 예루살렘을 재건했다.

그러나 그들의 귀향은 순조롭지 않았다. 새로운 나라를 건설해야 했지만 예상치 못한 갈등과 혼란에 빠졌다. 바벨론에 끌려가지 않고 남아 있던 사람들과 귀향한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빚어졌다. 혈통에 관한 논쟁도 이어졌다.

타향살이 수십 년 동안 혼혈이 된 2세와 3세들은 멸시의 대상이 됐다. 게다가 전통적인 유목경제에 상인경제가 혼합되면서 사회적으로 심각한 양극화와 반목이 빚어졌다. 한마디로 바벨론에서 해방된 이후 이스라엘은 마치 우리나라가 1945년 일제 해방 후 그랬던 것처럼 엄청난 대립과 분열, 거대한 정신적 소용돌이, 그리고 자기 정체성의 상실로 더 이상 하나의 민족으로 존립하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다.

바로 그때 그들이 예루살렘 수문 앞 광장에 모였다. 해방 후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며 여러 가지 발버둥을 쳤지만 더 이상 길이 없음을 깨달았을 때 이스라엘 전 백성이 수문 앞 광장으로 나왔다. 거기서 그들은 먼저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청했다. 새벽부터 정오까지 무려 7시간 이상 하나님의 말씀이 낭독됐다. 그때 성서는 사람들이 그 말씀을 다 듣고 나서 다 함께 울었다고 했다.(느헤미야 8:9) ‘함께 울었다’는 말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인간은 태어났을 때 맨 먼저 운다. 첫 울음은 아기의 폐를 확장시켜 숨을 쉬게 한다. 성인이 되면 기뻐서도 울고 슬퍼서도 운다. 여성의 평균수명이 남성보다 긴 이유는 더 많이 울기 때문이다.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장례식이 있던 날 영국은 울음바다가 됐는데, 이후 한동안 정신과 상담을 받는 환자수가 뚝 떨어졌다고 한다. 많이 울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울음에는 신비한 치유의 힘이 있다. 울고 싶을 때 울지 못하면 내 몸의 장기(臟器)가 대신 울다 병이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마도 소리 내어 엉엉 울었을 것이다. 왜 울었을까? 낭독되는 말씀을 “다 깨닫게 하니”(느헤미야 8:8) 울었다고 했다. 사실 그 말씀은 처음 듣는 말씀이 아니었다. 하지만 평소엔 귓등으로 흘려듣던 말씀이었다.

그런데 민족의 공멸 위기 앞에서 절박한 마음으로, 한자리에 모여 에스라의 성경낭독과 자상한 해석을 온 영혼으로 듣고 나니 비로소 깨달음이 왔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오래전부터 그들 앞에 생명과 공의의 길을 내놓으시고 그 길로 애타게 부르셨건만, 보란 듯이 불의와 죽음의 길만 골라 걸었던 자신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래서 울었을 것이다. 자신들의 어리석음이 슬퍼서 울었고, 언제나 처음부터 생명의 길로 부르고 계셨던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긍휼하심을 깊이 깨닫고 통한의 눈물을 쏟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눈물이 그들의 상처를 치유했다. 그 울음이 갈라진 민족을 하나가 되게 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하나님 앞에서 우는가? 가정과 일터에서 우리는 얼마나 진실로 가족과 동료와 손잡고 함께 우는가? 남과 북, 더구나 동과 서로 갈리진 이 민족은 도대체 언제쯤 하나님 앞에서 함께 울며 하나 되는 날이 올 수 있을까? 73년의 분단과 반목 그리고 증오의 역사를 털어내려면 먼저 울어야 한다. 함께 울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코람 데오) 남북이 함께 손잡고 울어야 한다.

장윤재 이화여대 교목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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