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역사여행] 생명 구해준 은인의 나라… 한국 고아들의 아버지 되다

소다 가이치 전도사와 서울 후암동 영락보린원

[한국기독역사여행] 생명 구해준 은인의 나라… 한국 고아들의 아버지 되다 기사의 사진
소다 가이치(1867∼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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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후암동 후암초등학교 아래 ‘영락보린원’이라는 사회복지시설이 있다. 남산타워를 고개 꺾어 봐야 하는 남산자락이다. 골목을 이리저리 휘돌아야 닿을 수 있는 영락보린원은 서울 영락교회 영락사회복지재단이 운영하고 있다. 야고보서 1장 27절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라’는 말씀에 따라 세워졌다.

한데 이 시설은 ‘대지 3199㎡, 건물 3251㎡의 지상 4층 콘크리트 건물’로 간단히 기록되기에는 아까운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일본인 소다 가이치 전도사와 한경직(1902∼2000) 목사가 ‘고아원 헌신’을 공유해서다.

영락보린원 정문에는 특별한 기념석 하나가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다. ‘전생서(典牲署) 터’, 즉 조선왕실 제사에 쓸 가축을 기르는 일을 맡았던 관청 터라는 표식이다. 이 관청은 1894년 갑오경장 때 폐쇄됐다. 따라서 후암동 일대는 초지였거나 소와 돼지우리가 있던 너른 산자락이었다고 보면 된다.

1921년 가마쿠라보육원 경성지부 고아원 원장으로 소다 전도사가 부임한다. 가마쿠라보육원은 1896년 일본인 사다케가 세웠으며 경성지부는 1913년 무렵 설립됐다. 한국 근대식 고아원의 시작이었다.

‘전도사’ ‘선교사’로 불린 소다는 황성YMCA(현 서울YMCA) 일어 교사 출신의 신앙인이었다. 훗날 ‘한국 고아의 아버지’로 불렸으나 생전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것을 극도로 싫어해 그에 관한 기록과 사료가 적은 편이다. YMCA 운동가 전택부(1915∼2008) 선생이 기독교 민족운동가들과 함께하며 조선 독립을 후원했던 소다의 삶을 정리해 놓은 것이 값진 1차 사료가 됐다.

지난 23일 서울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소다 가이치 묘역. 경기도 구리 장자교회 중고등부 학생 10여명이 교사들과 함께 찾았다. 묘원에 묻힌 선교사들의 삶과 신앙을 답사하는 일정이었다. 이들은 묘원 400여명의 유해 가운데 유일한 일본인 소다의 한국선교 이야기를 듣고 “놀랐다”고 말했다. 사랑은 국적의 문제가 아니라는 인식이 트인 계기가 된 듯했다.

소다의 유해는 1962년 4월 4일 이곳에 묻혔다. 1947년 한국을 떠난 지 14년여 만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고 그가 그토록 사랑하던 한국의 고아들이 살던 가마쿠라보육원(당시 ‘영락보린원’)에서 생을 마감한 것이다.

소다는 예수를 만나기 전까지 방랑자의 삶을 살았다. 일본 야마구치에서 태어난 그는 한학에 능통했으며 개화도시 나가사키에서 선진 문물을 접했다. 신학문을 배운 후 초등학교 교사가 됐으나 이내 그만두고 노르웨이 화물선 선원이 돼 홍콩 대만 등지를 떠돌았다. 시서화에 능해 어디 가나 존경을 받았다. 중국혁명의 아버지 쑨원을 만나 혁명운동에 가담하기도 했다.

소다는 두주불사였다. 어느 날 대만 거리를 방황하다 쓰러져 목숨이 위태로웠다. 하지만 아무도 그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한데 이름 모를 한국인이 그를 업고 데려가 치료해 주고 약값과 밥값을 내주고 사라졌다.

1905년 소다는 생명을 구해준 나라 한국에 들어왔다. 황성YMCA 학관에서 일어를 가르치며 생활하던 그는 이때 이상재 이승만 김규식 윤치호 김정식 홍재기 유성준 등 기독교 민족운동가들을 만나 교유하게 된다. 특히 이상재 이승만 등과는 각별했다. 무엇보다 월남 이상재가 항일운동으로 감옥에 들어가 그리스도인이 돼 출옥하자 그를 스승으로 삼고 자신도 예수를 믿는다. 그 무렵 한국은 대부흥운동이 한창이었다.

배우자 우에노 다키를 만난 것도 각성의 이유가 됐다. 미션스쿨을 나온 우에노는 숙명과 이화여학교에서 영어 교사를 하고 있었다.

생전 그와 교유했던 전택부 선생의 증언. “소다 전도사는 젊을 때 대주가였어요. ‘혈기왕성해 난폭한 짓을 많이 했다’고 말하곤 했죠. 일본어 교사로 있으면서 YMCA집회 참석과 이상재 선생 영향으로 신실한 사람이 됐습니다. 백만구령운동 당시 ‘동포여, 경성하라’는 전도지를 뿌렸는데 적극적으로 나서 복음을 전했죠. 금주회 회장도 했었어요.”

소다는 일어 교사를 그만두고 일본인 경성감리교회 전도사와 매서인을 겸했다. 그 무렵 105인 사건이 터졌다. 총독부가 1911년 한국 기독교인들이 데라우치 총독을 암살하려 했다며 대대적인 검거에 나서 600여명을 체포했다. 투옥, 추방, 망명 등이 이어졌다. 훗날 초대 대통령이 되는 이승만도 김규식과 함께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소다는 이에 분개했다. 대스승 이상재의 투옥을 참을 수 없어 당시 대법원장 와타나베를 찾아 석방을 호소했다. 또 일제의 불의와 만행을 맹렬히 공격했다. 총독부는 그를 ‘간사한 놈’ ‘한국인 앞잡이’ 등으로 몰아붙였으나 예수의 정의로 맞섰다.

1939년 소다는 ‘후암동 370번지’ 지금의 영락보린원 일대 3300㎡와 토지 내 부속 건물을 총독부로부터 대여해 고아원 시설로 면모를 일신시킨다. 전생서 옛터였다. 그들 부부는 해방 직전까지 1000여명의 고아를 거두었다. 가까운 경성역(서울역)만 나가도 버려진 아이들이 수두룩했다. 중일전쟁이 한창일 때는 헌병대에 불려가 “한국 고아들을 데려다 항일 교육을 시킨다”며 탄압을 받았다. ‘보육원 불령선인’(반일 조선인)은 보육원을 나와 지하조직 활동을 하는 청년들이었다. 그는 헌병대에 “내 불찰”이라며 머리 숙인 뒤 그들을 일단 빼냈다. 악질 일본인과 한국인들에게 ‘위장한 자선가’라는 모함도 받았다.

그러니 고아원은 폐원 위기에 놓였다. 어느 날 아침. 정문에 보따리 하나가 놓여 있었다. ‘소다 선생님 내외분. 우리 동포를 대신하여 감사드립니다. 저는 사정이 있어 국외로 망명합니다. 부디 이 돈과 물건을 받으시고 불쌍한 고아를 위해 써주십시오’라고 적혀 있었다. 부부는 하나님의 천사가 다녀갔다며 눈물의 감사 기도를 했다.

1943년 무렵 소다는 함경도 원산감리교회 전도사로 부임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해방을 맞았다. 일본에 대한 분노가 폭력으로 이어졌고 소다는 일본인을 교회 안으로 피신시키고 군중을 설득했다. 그의 인품을 아는 군중이 순순히 물러났다.

해방 후 소련군이 교회를 습격하자 서울로 온 그는 1947년 보육원을 아내에게 맡기고 일본 전도여행을 떠났다. ‘주님의 은혜를 어찌 다 갚으리오. 세월만 허송하여 백발이 성성하다.… 나는 동쪽나라로 여행을 가야 하네’라는 한시를 남기고였다.

이때 이들 부부는 세 가지 서약을 한다. 첫째 하나님 은혜를 확신한다. 둘째 어떤 재난이 오더라도 십자가를 우러러보며 마음의 평화를 간직한다. 셋째 하나님의 가호를 빌며 살다가 천국에서 만난다. 그렇게 한국을 떠난 소다는 성경을 쥐고 ‘세계평화’라고 적힌 띠를 두르고 전도여행을 하며 믿지 않는 영혼들의 회개를 촉구했다. 일본 언론이 ‘조국 전도를 위해 귀국’이라는 기사를 쓰면서 그에게 전도 이유를 묻자 “우리 모두 예수를 믿을 특권과 그분을 위해 고난당하는 특권, 또 섬기는 특권을 받았다. 한·일 친선은 이루어질 것이다. 경성에만 한국인과 결혼한 여성이 700∼800명이다. 재일 한국인 60만명에 대해서도 일본인은 조금 더 올바르게 이해하기 바란다. 나는 장차 한국인들과 같이 있기를 원한다”고 답했다.

1950년 한국 고아와 끝까지 남아 있던 부인이 죽었다. 그는 도리어 찬송과 감사로 하나님의 가호를 빌었다.

1960년 1월 1일 아사히신문은 ‘한국 대통령 이승만의 오랜 친구 소다옹이 한국 귀환을 희망한다’고 보도했다. 이때 가마쿠라보육원 터에 영락보린원을 세운 한경직 목사는 한·일 단교의 상황에서 재정 보증을 서면서까지 귀환을 도왔다. 김포공항에서 그를 맞아 옛집으로 안내한 것이다. 다시 고아들을 무릎에 앉힌 그는 성경을 읽고 찬송을 불렀다. 우리 정부는 일본인에게 처음으로 문화훈장을 추서했다.

한편 한 목사의 사회로 서울YMCA에서 거행된 그의 추도식을 앞두고 반일 감정 때문에 협박 편지 등이 이어졌으나 한국교계는 “아무리 일본인이라도 우리 민족에 은혜를 끼친 사람이면 보답하는 것이 도리 아니냐”며 물리쳤다. 1962년 조성된 묘원 비석. 시인 주요한 글, 서예가 김기승 글씨의 ‘그리스도의 사랑을 몸으로 나타냄이라’라는 각자가 뚜렷하다.

▒ 공산당 탄압 피해 월남한 한경직 목사
가마쿠라보육원 터에 영락보린원


한경직 목사가 이사장이었던 영락보린원은 1939년 신의주제2교회 부설 신의주보린원이 그 시작이다. 당시 드물게 양식 건물의 고아원과 경로원 두 동 그리고 그 옆에 신의주제2교회 담임인 한 목사가 기거하던 사택을 갖춘 ‘타운’이었다. 지금도 영락보린원에 당시 사진이 걸려 있다. 해방 직후 한 목사는 교인과 원생을 이끌고 공산당의 탄압을 피해 월남했다. 그리고 1947년 서울 충무로2가에 보린원을 재건했고 이듬해 가마쿠라보육원 터를 인수해 영락보린원이라 칭했다. 1989년 개원 50주년 기념예배에서 한 목사가 “해방 후 혼란기에 고아원이 불타 없어지고 터만 남았다”며 “미국과 교섭해 천막을 얻어와 고아원을 시작했다”고 한 것에 미루어 보린원 전신 가마쿠라보육원은 소아 가이치 전도사와 우에노 다키 부부의 노력에도 반일 감정 등으로 운영이 쉽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글·사진=전정희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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