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전철]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기사의 사진
한 정치인, 그는 유독 특별했다. 권위의식과 부패가 가득한 정치 현장에서 소탈과 진보의 아이콘이었다. 허세가 없었다. 애환이 깃든 서민을 사랑했고 당대 최고 권력을 비판했다. 풍자와 해학의 수사로 완고한 정치의 언어가 붕괴되는 장면에서 우리는 웃으며 새로운 정치의 희망을 보았다. 그의 인간미와 촌철살인은 친근함과 신선함의 이모티콘이었다.

21세기 대한민국 시민들이 진단하는 한국 정치의 풍경은 무엇일까. 혹시 정치는 다양한 이해관계의 강자들이 이익을 확대하는 수단과 도구 아니었던가. 막강한 재벌 경제체제는 이익의 극대화를 위해 정치와 야합의 손을 끈질기게 잡지 않았던가.

연약한 우리는 하나님과 맘몬 사이에서 여전히 흔들린다. 타락한 정치는 권력의 빨간 약과 돈의 파란 약 사이에서 고민한다. 권력과 돈의 끈끈한 결탁에서 우리 사회와 공동체는 그간 얼마나 많은 좌절과 절망을 경험했던가.

우리는 20세기 말과 새로운 밀레니엄의 문턱에서 그를 만났다. 새로운 미래에 대한 희망은 지금 어느 구석에서 처량하고 쓸쓸하게 굴러다니고 있는가. 지나가 보니 세기말적 꿈은 상당히 낙관적이었으며 우리의 현재는 여전히 미흡하다.

한 정치인이 죽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삶을 꿈꾸었던 한 사람이 떠났다. 그 소식은 매우 충격적이다. 그는 왜 자신의 생명을 아스팔트 바닥에 던졌을까. 생명은 결코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고귀한 가치 아니었던가. 시민들의 마음은 험난한 세상에서 얻은 작은 실수와 상처로 지극히 괴로워하는 한 선한 사람을 바라보는 비통한 심정이리라.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생명이지만 그는 자신의 혹독한 참회를 누구도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방식인 생명의 거둠으로 관철했다. 어떠한 엄격한 잣대로 자신의 인생을 비추어보았을까. 자신보다 훨씬 더럽고 추악한 정치의 뒷골목에서 왜 자신을 허공에 날렸을까. 그 내면의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진정 누가 더 깨끗한 삶을 산 것일까.

만약 그가 진보의 정신을 말과 삶의 일치로 이해했다면, 혹시 그는 말과 삶의 일치를 마지막 죽음으로 완성한 것이었을까. 철학자 막스 셸러의 마지막 강의 주제는 죽음이었다. 다음날 강의를 기다리는 학생들에게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조교가 강의실로 들어와 울먹인다. “셸러 교수님께서 어젯밤 운명하셨습니다.” 막스 셸러가 죽음으로 죽음에 대한 마지막 강의를 완성했다면, 그의 죽음은 이 시대 진보의 과제를 우리에게 역설적으로 던진다. 끝까지 그의 마지막 관심은 삼성 백혈병 피해자와 정규직 복직이 이뤄진 KTX 해고 승무원들에 대한 감사와 축하였다.

그의 죽음에서 우리는 정치의 의미를 묻는다. 그의 죽음은 잔인한 현실 정치의 폭로 같기도 하다. 정치를 통한 생명의 회복은 사라진 채 정치를 통해 구축되는 비열한 죽음의 정치만 폐허처럼 남아있는 것 같다. 파괴적인 정치는 다시 정치를 파괴한다. 거기에서 수많은 투명인간이 생산되며 동시에 사회로부터 배제된다. 하여 사회적 보호장치 없이 비참하게 살아가는 이웃을 향한 사랑과 연민의 정치가 요구된다. 강자의 정치가 아닌 약자의 정치. 비난의 정치가 아닌 성찰의 정치. 정치의 생존 논리에 매몰되지 않는 문명화된 양식과 공동체적 가치의 함양과 헌신.

그의 빈자리를 보며 어리석은 질문을 던진다. 우리 인생의 관심은 무엇에 있는가. 우리 영혼의 시선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 사회와 종교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지금 종교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 강한 자의 종교가 아닌 약한 자의 종교. 욕망의 종교가 아닌 성찰의 종교. 돈과 힘의 종교가 아닌 사랑과 나눔의 종교.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종교(롬 12:15).

26살 용접공으로 사회의 희망을 꿈꾸었던 젊은 청년.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을 슬픈 마음으로 애도한다. 평안한 영면을 기원하며 그의 영정 앞에 백장미 한 송이를 바친다.

한신대 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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