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강주화] 노회찬, 그의 소멸을 딛고… 기사의 사진
작가에게 무슨 책을 읽는지 물었다. ‘아버지의 유산’이 최근 가장 인상 깊었다고 했다. 그가 좋아하는 미국 소설가 필립 로스가 썼다. 병든 아버지가 죽음과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아들의 눈으로 기록했다. 작가는 몇 해 전 작고한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렸다고 했다. 세상의 모든 아들은 아버지가 남긴 것을 간직하며 살다가 언젠가 아버지의 뒤를 따라 사라지는 모양이다.

그가 말했다. “부모는 자식에게 모든 것을 내준 뒤 흙으로 돌아가고 자식의 삶은 부모라는 존재가 사라지면서 생겨난다. 자연이 원래 그런 것이다. 우리 눈앞의 저 초록 이파리 역시 지난겨울 나무가 떨어뜨린 잎사귀의 소멸을 딛고 생겨나지 않았나.” 지난 5월 로스의 타계 소식을 들은 뒤에는 로스가 자신에게 남긴 문학적 유산도 돌아보게 됐다고 덧붙였다.

누군가 떠나면 우리는 이렇게 그가 남긴 것을 헤아려 보게 된다. 정치인 노회찬이 세상을 떠난 뒤 많은 이들이 애도하고 있다. 세브란스병원 빈소에는 1만명 넘는 시민이 다녀갔고 SNS에도 추모 글이 끊이지 않는다. 국회의 어느 보좌관은 이메일을 보내면서 “오늘 세상을 떠난 그분은 제게 돈과 예술의 기준을 가르쳐주셨다. 황망하기 그지없다”고 했다. 소도시에서 아이 셋을 키우고 있는 친구는 “내가 진보정당 활동을 시작한 계기가 됐던 분”이라며 “아리고 먹먹하다”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어느 해인가 빈민선교단체 행사에서 노회찬을 본 적이 있다. 총선에서 서울 노원병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뒤였다. 참석자의 손을 하나하나 다 잡아주었고 나도 그와 악수를 할 수 있었다. 낙선한 이가 조촐한 모임에 와줬던 것이 쓸쓸하면서도 포근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사람은 가도 그 기억과 흔적은 우리에게 남는다. 노회찬은 무엇을 남겼을까. 상황이 험악할수록 유머와 재치가 필요함을 보여줬던 것 같다. 2013년 ‘안기부 X파일’ 공개로 의원직을 잃고 국회를 떠날 때였다. X파일은 삼성그룹이 검사 등 유력 인사에게 ‘떡값’을 돌렸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고, 그것을 인터넷에 공개한 그에게 유죄가 선고된 터였다. 노회찬은 “떡값 받은 이들은 가만히 놔두고 이 사실을 공개한 나에게 유죄를 선고하는 것은 폐암 환자의 암 걸린 폐는 그냥 두고 멀쩡한 위를 들어낸 의료사고”라며 대법원을 통렬히 비판했다. 이 말을 하는 동안에도 그의 얼굴은 노기가 아니라 미소가 어려 있었다. 결국 부패한 재벌과 권력은 ‘암 걸린 폐’로, 폭로한 노회찬은 ‘멀쩡한 위’로 내 머릿속에 각인됐다.

“한나라당과 민주당, 고생하셨습니다. 이제 퇴장하십시오. 50년 동안 썩은 판을 이제 갈아야 합니다. 50년 동안 똑같은 판에다 삼겹살을 구워먹으면 고기가 시커매집니다. 판을 갈 때가 이제 왔습니다.” 2004년 총선을 앞두고 KBS 심야토론에 나와 설파한 이 유명한 ‘삼겹살 불판갈이론’은 무명에 가깝던 그를 스타 정치인으로 만들었고, 소수 야당이던 민주노동당의 정당득표율을 13%까지 끌어올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가 세상을 등지기 전 마지막으로 작성한 메시지는 10여년 투쟁 끝에 복직한 KTX 승무원들에게 축하 인사를 보내는 거였다고 한다. 승무원들은 노회찬을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애써준 정치인으로 기억하며 고마워했다.

노회찬은 거악에 맞서 싸우며 약자 편에 서 왔다. 유머러스한 진보 정치인으로 정파에 상관없이 많은 국민의 신뢰와 사랑을 받았다. 27일 국회에서 영결식이 열린다. 이제 ‘호빵맨’이란 별명처럼 가장 웃기고 따뜻했던 정치인 노회찬을 보낼 시간이다. 우리가 그의 소멸을 딛고 그 유산을 간직하며 사는 길은 그가 보여준 유머와 온기, 여유와 용기를 일상과 사회에 퍼뜨리는 것일 테다. ‘당신 덕분에 저는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삽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한 시민이 그의 빈소에 남긴 문구처럼. 호빵맨, 부디 잘 가시오!

강주화 문화부 차장 rul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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