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래 칼럼] 한국 사람은 무엇으로 사나 기사의 사진
국민 대부분이 유교문화에 익숙하면서도
天下爲公의 참뜻 거의 잊고 살아온 게 아닌지
1000만명에 가까운 기독교인이 있지만
共同善을 추구해야 한다는 가르침엔
그리 귀 기울이지 않아


찜통더위 탓인지 사고가 정지된 느낌이다. 그럼에도 이열치열을 외쳐본다. 생각을 골똘히 하는 것도 더위엔 효과적일 터다. 외부 기온보다 더 뜨겁게 생각의 온도를 높여보면 어떨까. 요즘 우릴 열통 터지게 하는 재료가 어디 한둘인가.

레프 톨스토이가 쓴 동화 같은 단편소설 ‘사람은 무엇으로 사나’(1885)는 인간 세상에 온 천사 미하일(미카엘)을 통해 사람에게 있는 세 가지 특성을 밝힌다. 즉 ‘아무리 비루한 사람이라도 마음속엔 사랑이 담겨 있다’ ‘사람은 바로 눈앞에 벌어질 일조차 알지 못한다’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이다. 과연 사람은 사랑으로 사는가.

한국 사람은 무엇으로 사나. 아니 무엇을 위해 사나. 아마도 사랑보다 더 중시하는 가치들이 쏟아질 것이다. 자기 자신이나 자녀들이 뭐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도 역시나 사랑을 앞세우는 이들은 많지 않을 듯하다. 남보다 많이 배우고 훌륭한 지위에 올라 명예를 얻고 부를 추구하려는 게 훨씬 더 일반적이지 않을까 싶다.

톨스토이가 말하려 했던 사랑은 이웃에 대한 관심이고 공동체에 대한 협력적 태도였다. 이에 비추어보면 한국사회는 여러모로 많이 모자란다. 구체적인 사례는 너무나 차고 넘치기에 일일이 거론할 나위도 없다. 사실 우리 사회가 원래 그리 강퍅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근원을 따져 궤도 수정을 꾀해야 맞다.

한국만큼 유교적 전통을 중시하는 나라는 없다. 문제는 유교가 봉건적 위계질서를 중시하는 모습으로만 드러나 종종 폄하되고 있다는 점이다. 유교를 낡은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오늘에도 통용될 수 있는 유교적 가치도 있다. 바로 천하위공(天下爲公: 세상은 모두를 위한 것, ‘禮記·예기’)이다. 예를 중시했던 공맹(孔孟)의 현현(顯現)이다.

김상준 경희대 교수는 천하위공에 대해 “인간문명, 천하의 모든 일은 공(公)의 실현을 향해 나간다는 뜻이며, 공이란 공공성이요 정의”라고 지적한다(‘맹자의 땀 성왕의 피’, 2011). 유교가 한국인들에게 깊이 체화돼 있으면서도 고루한 것으로 저평가된 데엔 그간 지배층이 천하위공을 애써 외면하면서 권력의 당위성만 강조한 탓이 크다.

마찬가지로 한국 근현대사에서 큰 역할을 맡아온 기독교계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다. 기독교 신앙의 초점이 개인구원에 있다고 보는 경향이 적지 않지만 프로테스탄트의 신학적 토대를 제공한 장 칼뱅은 개인구원뿐 아니라 신앙의 공적 역할을 더 강조했다. 바로 공동선(共同善·the common good)의 추구다. 공동선은 “공과 사를 아우르는 개념이며, 사적 선과 공적 선의 조화를 모색하는 것”(송용원, ‘칼뱅과 공동선’, 2017)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천하위공이든 공동선이든 그 무엇 하나 제대로 작동되고 있지 않다. 국민 대부분이 유교문화에 익숙하고 1000만명에 가까운 기독교인이 있지만 각각의 핵심가치를 지켜내지 못하고 있다. 공(公)과 공동체의 의미가 외면당하는 사회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부를 뿐이다.

이젠 우리 사회가 추구해 온 가치가 달라져야 한다. 문재인정부의 ‘사람이 먼저’라는 슬로건은 보편적 인간의 존엄성을 내세운다는 점에서 울림이 있지만 새 시대를 위해 어떤 사람을 키워내야 하는 내용이 없어 매우 아쉽다. 지금은 교육제도 쇄신보다 교육철학 정립이 더 필요하다. 모든 직업을 통틀어 무엇이 될 것이냐가 아니라 어떤 직업인이 되느냐가 중요하다.

특히 인재양성이 ‘입시경쟁→일류대학→대기업·전문직 취업’이라는 단일 직업경로(커리어패스)에 매몰돼 있는 한 공동선은 거론하기조차 어렵다. 우선 입시와 취업이 최우선되면서 공(公)과 공동체는 무시되기 일쑤다. 또한 단일 커리어패스 대열에 끼어들지 못한 숱한 사람들은 좌절감에 빠진 채 공동체 밖으로 떼밀려나기 쉽다. 남는 건 무관심과 적개심뿐이다.

적개심을 없애자면 단일 커리어패스부터 없애고 다양성을 감안한 직업경로를 두루 마련해야 옳다. 이는 정시와 수시 비율을 어떻게 하느냐보다 훨씬 더 중대한 문제다. 뿐만 아니라 어릴 때부터 사람됨의 가치, 함께한다는 것의 위대함을 가르쳐야 한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학교에서. 그것이 천하위공의 실천이요 공동선을 추구하는 건강한 사회의 모습이다.

획일적이고 무관심한 사회로는 후기산업사회,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제대로 대처하기 어렵다. 인공지능(AI)이 대부분의 지식을 지원하는 마당이니 학력 위주의 단일 커리어패스는 한계가 분명하다. 갈수록 중시되는 창의성은 상대에 대한 관심, 공(公)에 대한 배려에서 극대화될 수 있다. 이 답답한 상황을 돌아보다 보니 삼복에 더위는커녕 되레 오싹해질 지경이다.

대기자 jubi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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