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호 칼럼] 진짜 보수 해보고 싶지 않나 기사의 사진
보수 정치가 고꾸라졌지만
한국당, 존재 이유에 대한 근본적 성찰없어
김병준 개혁 성공하려면 치열한 가치 논쟁 필요
대의원 교체하고 보수의 언어로 미래 말해야


자유한국당의 김병준 비상대책위원장 체제가 출범한 지 보름이 됐지만 예상대로 그다지 여론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다. 이제 막 비대위원 구성을 끝내고 일 좀 해보려고 하는 시점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보다는 어떤 뛰어난 사람이 온들, 어떤 파격적 조치가 나온들, 뭐가 바뀌겠는가 하는 예상이 훨씬 더 많기 때문이리라. 그렇게 해서 바뀔 정도면 이렇게까지 망하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시각이 더 많다. 그러니 한국당이 뭘 해도 덤덤한 게 현실이다. 이것은 김 비대위원장 개인 때문이 아니다. 그의 능력 문제도 아니다. 한국당 자체가 보수 가치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다.

한국당이 존재해야 할 가치는 무엇인가. 보수 정치가 이렇게 고꾸라졌어도 이에 대한 대답을 찾으려는 진지한 노력을 당내에서는 흔적도 찾을 수 없다. 조금이라도 보수 정치의 책임을 느꼈다면 그 쉬운 폐족 퍼포먼스도 할 법한데, 그런 시도조차 아직은 없다. 생각이 없으니 행동이 없는 것일 게다.

새 출발을 하려면 정리가 필요하다. 공과를 구분하고 성찰과 함께 미래를 말해야 한다. 분단이라는 특수 상황에서 근대화·산업화라는 업적에는 자부심을 가져도 된다. 하지만 한국당과 그 전신을 중심으로 한 우리의 보수 정치는 보수라는 외피를 뒤집어쓰고 사실은 국가주의, 권위주의를 슬쩍 민주주의로 치환했다. ‘민주주의=반공’이라는 등식을 주입시키면서 말이다. 이젠 가짜 보수에서 벗어나야 한다. 보수라는 그릇에 진짜 보수적 가치를 담을 때가 됐다.

사실 보수 정치는 2004년 총선 참패 뒤 쇄신할 기회가 있었다. 정치학 교수 출신 박세일 전 의원 등이 ‘보수의 사상전’을 제안했었다. 이 보수의 가치 논쟁이 치열하게 펼쳐졌더라면 지금 보수 정치가 이 정도 수준으로 떨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보수의 가치를 재정립하려 했던 움직임은 반공과 지역주의의 강고한 벽을 뛰어넘기에는 너무 힘이 부쳤다.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시대정신이 바뀌었고, 보수 정치가 꽝이었다는 걸 모두가 알아버렸다. 이런 정치라면, 이런 가치를 추구한다면, 재집권은 불가능하다. 가치와 명분으로 모인 게 아니라 이익과 기득권으로 뭉쳤다고 비판받는 지금의 보수 정치인들에게 재집권을 향한 절박성이 아직 남아 있는지는 모르겠다. 남아 있다면 작금의 환경이 어찌 보면 기회일 수도 있다.

김 비대위원장이 취임하자마자 국가주의를 화두로 던진 것은 뜬금없다. 한국당 자체가 국가주의로 버텨온 당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단히 정치 현실을 계산한 것 같다. 그의 의도는 명확하게 읽힌다. 정치권에서 가치 논쟁을 불러일으켜 보수 재건의 발판으로 삼겠다는 뜻이다. 의도적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과 문재인정부를 끌어들였으니 보수뿐 아니라 진보 진영까지 ‘가치 전쟁’에 몰아넣는 형국이다. 그는 현 정권의 국가주의를 비판하는 소재로 학교 내 자판기와 먹방 규제를 들었다. 주로 경제·복지 분야의 정부 간섭을 국가주의로 규정해 공격할 모양이다. 현실적으로 당 안에서는 노선 투쟁으로, 당 밖에서는 여권과의 가치 전쟁이라는 투 트랙 전략인 듯하다. 본질은 사실상 하나지만 보수에게만 쏠리는 혁신의 부담을 분산하고, 한국당에 실망하고 있지만 여전히 반 여권 성향 지지층을 붙잡아두는 효과가 있겠다.

이 전략으로 보수 재건이 성공할지는 어느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성공하기 위한 필요조건은 있다. 우선 가짜 보수를 솎아내야 한다. 보수는 죄가 없다. 가짜 보수가 문제일 따름이다. 그것은 정당의 뿌리인 대의원 교체에서 시작돼야 한다. 공화당, 민정당 때의 낡고 늙은 정신으로 무장된 대의원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한 제대로 된 보수 가치를 담는 그릇 자체가 형성될 수 없다. 보수 정치가 근본적으로, 실질적으로 변화하기 위해선 대의원 세대교체가 필수적이다. 국회의원과 당협위원장 몇몇 바꾼다고 될 일이 아니다. 둘째, 보수의 언어로 미래를 말해야 한다. 진보는 큰 변화를 위해 과거를 부정하는 적폐청산 같은 전략을 주로 쓴다. 그리고 미래는 이상적으로 표현한다. 물론 과거 잘못된 것은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 진짜 보수는 거기에다 실현 가능한 미래를 함께 말해야 한다. 자유, 책임, 희생 등 보수의 가치를 담은 언어로 말이다.

가짜 보수 정치가 사라지고 진짜가 그 자리에 들어서야 국민이 다시 보수 정치에 눈길을 줄 거다. 그래야 진보 진영도 긴장한다. 한국당 의원들에게, 대의원들에게, 보수 진영에 속해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한번 묻고 싶다. 진짜 보수 해보고 싶은 생각 없냐고.

수석논설위원 mh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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