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굴! 이 사람] 6·25 때 부모 잃은 어린이 사랑, 예수님 그림에 고스란히 담아

한국적 풍속화 그린 김학수 화백

[발굴! 이 사람] 6·25 때 부모 잃은 어린이 사랑, 예수님 그림에 고스란히 담아 기사의 사진

이전이미지다음이미지

색동저고리에 다홍치마를 입은 아이들이 예수님 손을 잡고 있다. 연분홍 봄꽃을 뒤로한 채 민들레 풀밭을 거닌다. 옆 그림은 감나무 아래서 아기를 안은 예수님이다. 댕기머리 동네 애들을 불러 놓고 말씀을 전하는 듯하다. 누가복음은 이렇게 말한다.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눅 18:16)

명작은 디테일이 강하다. 검은 눈의 예수님 발엔 샌들이 신겨 있다. 망토 차림의 옷은 한복의 도포처럼 보인다. 그림엔 ‘예수께로 가면 나는 기뻐요. 나와 같은 아이 부르셨어요’라는 글귀가 나온다. 교회 여름성경학교에서 목청 높여 부르던 바로 그 노래다.

지난 19일 경남 김해 인제대 혜촌 김학수 기념박물관에서 이 그림들을 만났다. 한지에 채색 수묵으로 한국적 풍속화를 그려온 김학수(1919∼2009·서울 시온교회 장로·사진) 화백이 2003년 인제대에 기증한 성화들이다. 김 화백이 부산권인 인제대에 예수님과 아이들 그림을 선사한 데엔 특별한 사연이 있다. 부산 피란 시절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돌보는 데서 그의 호를 딴 ‘혜촌회’가 만들어졌다. 혜촌회는 김 화백에게 도움을 받은 전쟁고아, 제자, 동료들이 그의 뜻을 기리기 위해 만든 단체다.

김 화백은 평양 출신이다. 태어난 이듬해인 1920년 어머니가 다니던 평양 남산현감리교회에서 영아세례를 받았다. 부친이 붓 만드는 필방을 했음에도 매일 그림을 그리던 김 화백의 종이값을 대기가 버거웠다. 그만큼 다작으로 다져진 작가였다. 한국전쟁 당시 처자식을 안전한 처가에 보냈다가 유엔군이 후퇴하면서 급하게 본인만 남으로 내려왔다. 이후 90세로 서울에서 별세할 때까지 평생 북의 가족을 그리며 독신으로 생활했다.

대신 김 화백 곁에는 아이들이 있었다. 1951년 부산에 내려온 그는 시온교회 창립을 돕고 초량동에도 천막교회를 세운다. 피란으로 극심한 가난을 경험하던 시절 김 화백은 영도에 있는 대한도기회사에 다녔다.

혜촌회 회장인 이승규 대전 대덕교회 장로는 31일 국민일보와 통화에서 “접시에 그림을 그려 받은 돈으로 김 화백이 전쟁 통에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먹이고 입히고 재운 데서 혜촌회가 시작됐다”면서 “아버지 같은 김 화백의 도움으로 목회자와 신학교수가 된 이들이 수십 명”이라고 말했다. 이 장로도 결혼 전까지 김 화백 집에서 숙식을 함께했으며 이후 연세대를 나와 삼성그룹 공채 1기로 들어갔다. 삼성과 롯데그룹에서 이사직까지 올랐고 서울 소망교회 초대 장로를 역임했다.

혜촌 기념박물관장인 인제대 박재섭 교수는 “김 화백 거실의 삼락당(三樂堂) 액자를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세 가지 즐거움이 뭐냐’고 물으면 김 장로는 생전에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것, 주위에 항상 좋은 사람이 많은 것, 기독교 신앙으로 은혜와 사랑 가운데 사는 것”이라고 답했다.

인제대는 혜촌 기념박물관을 대학의 심장인 도서관 입구에 배치해 김 화백을 기리고 있다. 기독교 작품 말고도 김 화백이 40년간 작업한 360m 길이의 한강 전도 두루마리 산수화의 일부 등이 전시돼 있다. 박물관 유은미 사서는 “강원도 오대산의 한강 발원지부터 인천 강화도 하구까지 40년 넘게 발품으로 답사해 한강 유역을 그려낸 국내 최장 길이의 산수화”라고 말했다.

김 화백의 작품은 서울 연세대 루스채플과 경기도 용인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에도 전시돼 있다. 한국기독교미술인협회 창립 멤버인 김 화백은 이 모든 작품을 누구나 감상하도록 무상으로 기증했다.

김해=글·사진 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