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태원준] 이기적인 국민 기사의 사진
김종필 전 총리는 입버릇처럼 “국민은 호랑이”라고 했다. 미국 대통령을 지낸 해리 트루먼에게 들은 말이었다. “국민은 호랑이고 정치인은 사육사다. 사육사가 열 번 잘해줘도 한 번 못하면 호랑이는 물어버린다. 정치인은 국민이 호랑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1960년대 미국에서 만났던 트루먼의 조언을 그는 여러 정치인에게 들려줬다. 국민이 언제까지나 지지해주리라 기대하지 말라, 국민을 무서워하라는 취지였다.

2016년 여름 나향욱씨는 “민중은 개·돼지”란 말을 했다. 기자들과 저녁을 먹다가 술이 과했는지 더워서 짜증이 났는지 “어차피 다 평등할 순 없다. 민중은 개·돼지로 취급하면 된다. 신분제를 공고히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시를 거쳐 교육부 고위 간부가 된 이의 말에는 “난 개·돼지와 다르다”는 엘리트 의식이 깔려 있었다. 파면됐지만 법원이 구제해줘 복직했다. 직급이 강등됐는데 그것도 과하다고 이의를 제기해 심사 중이다.

법원행정처 문건에서 “국민은 이기적 존재”란 표현이 발견됐다. 내 사건은 대법원까지 가야 한다는 ‘이기적 국민’ 때문에 상고법원이 호응을 얻지 못한다며 ‘이성적 법조인’과 다르게 접근해야 한다고 적어 놨다. 나향욱을 겪은 터라 노골적인 엘리트 의식은 새삼스럽지 않은데 엘리트라는 이들의 문장과 논리가 너무 유치해 놀라웠다. 도덕 시간에 선악과 규범을 배우기 시작한 초등학생들이 말싸움할 때 “넌 이기적이야!” 하는 그 단어가 버젓이 적혀 있었다. 이렇게 원초적인 표현으로 누군가를 규정하는 건 매우 위험한 일임을 깨달아 학년이 높아질수록 입에서 멀어지는 말인데 법원은 국민을 싸잡아 과감하게 이를 사용했다.

함께 공개된 문건에는 ‘영장 없는 체포’를 용인해 법무부를 설득하자는 대목이 있다. 숙원사업을 위해서라면 국민의 인권쯤은 희생해도 된다는 발상이야말로 지독한 조직이기주의 아닌가. 이에 비하면 쿠데타를 일으켰던 구시대 엘리트의 호랑이론은 차라리 고상해 보인다. 한국 엘리트의 수준이 너무 낮아졌다.

태원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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