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한장희] ‘공론’으로 포장된 결정장애 기사의 사진
선택은 원래 어렵다. 하지만 ‘신드롬’이라 불릴 정도로 결정장애가 만연했다면 분명 문제다. 뇌과학자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는 사회현상이 된 우유부단함의 원인으로 ‘데이터 스모그’를 꼽았다. 인터넷 등을 통해 접하는 데이터가 많아 옥석 가리기가 어려워졌고, 가짜 뉴스까지 판쳐 정보에 대한 확신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선택이 가져올 결과에 대한 두려움도 결정을 힘들게 한다. 정 교수는 “한 번 잘못 선택하면 큰일 나는 사회, 패자부활전이 없는 각박한 사회가 결정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고 했다. 그래서 실패해도 재기할 수 있는 토양인 사회안전망을 구축하는 게 시급하다고 했다.

문제는 사회안전망 구축의 주체인 정부의 결정장애가 더 심각하다는 점이다. 책임이 두려워 결정을 피하는 이른바 ‘변양호 신드롬’은 최순실 사태 이후 공직 사회에 더 깊은 뿌리를 내렸다.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문재인정부가 들고 나온 게 ‘숙의(熟議) 민주주의’다. 신고리 5, 6호기 공사 재개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공론조사가 그 시작이었다. 여론조사와 달리 충분한 정보와 생각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 뒤 시민들의 의견을 듣는 방식이다. 새 실험은 사회 갈등 이슈를 시민들의 논의로 해결했다는 측면에서 나쁘지 않은 점수를 받았다.

그런데 ‘망치를 쥔 사람은 모든 것을 못으로 본다’는 말이 있듯이, 한 번 좋은 평가를 받고 나니 못이 아닌 데도 계속 망치를 찾는 일이 잦아졌다. 정부 내 결정장애가 가장 심각한 곳은 교육당국이 대표적이다. 설익은 정책을 발표했다가 수차례 여론의 뭇매를 맞았던 교육부는 불편하고, 불안하다 싶은 이슈를 모두 ‘국민이 결정해주십시오’라고 떠넘기고 있다. 대입제도 개편에 이어 학교폭력 대책 개선방안, 유치원 방과 후 영어수업 금지 여부를 정책숙려제 대상으로 삼고 국민에게 결정을 맡기기로 했다. 자율형사립고·외국어고 폐지 여부도 차기 공론화 과제로 삼는 분위기다. 조희연 서울시교육감도 불편한 교복을 편한 교복으로 바꾸는 자신의 공약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시민들에게 정해 달라고 요청했다.

공론조사 남발을 바라보는 교육계의 시선은 편치 않다. 교육 전문가들은 대입 개편을 공론조사로 정하는 게 애초부터 잘못된 판단이었다고 말한다. 찬반만 정하면 되는 신고리 원전 때와 달리 경우의 수가 많고 복잡한 대입 개편안을 비전문가인 시민들에게 맡기는 게 적절하지 않다는 얘기다. 지난달 말 3일간의 합숙 토론에 참여한 시민참여단 중 일부도 복잡한 입시제도를 이해하기엔 시간이 부족했다고 지적했다는 후문이다. 충분한 정보와 생각할 수 있는 환경 제공이라는 공론조사의 전제 조건이 충족됐는지에 대한 의문이 드는 대목이다.

시민참여단의 논의 범위를 수능 평가방식과 정시확대 여부 등을 조합한 네 가지 시나리오로 한정한 점도 지적받아 마땅하다. 3일 발표되는 공론조사 결과에 직접 영향을 받는 대상은 현재 중학교 3학년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의 핵심 인재로 키워져야 할 이들이다. 주지하다시피 4차 산업혁명 시대의 교육 시스템은 인공지능이 할 수 없는 영역, 즉 비판적이고 창의적인 사고를 키우는 일에 맞춰져야 한다. 그런데 네 가지로 한정한 시나리오 중 점수를 많이 얻는 하나가 학생과 대학의 자율과 창의가 존중되는 교육 시스템으로의 전환을 이끌어낼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진보·보수 시민단체들도 한목소리로 대입 개편을 공론화에 부친 것 자체가 잘못이라고 말하고 있어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불복 움직임이 뒤따를 것으로 보인다.

운이 좋아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못이라면 손에 쥔 망치가 안성맞춤의 도구일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처한 상황에 맞는 다양한 도구가 필요하다. 공론조사를 시민 뜻을 받드는 착한 행정이자 만능 도구로 믿어서는 안 된다. 결정장애를 덮거나, 책임면피용으로 남용하는 일은 더더욱 안 된다.

한장희 사회부장 jhha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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