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참배 80년, 이젠 회개다] “신사, 기독교 교리에 어긋나지 않는다”… 치욕의 선언

예장총회 회의록으로 본 1938년 신사참배 결의

[신사참배 80년, 이젠 회개다] “신사, 기독교 교리에 어긋나지 않는다”… 치욕의 선언 기사의 사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임원들이 1938년 9월 10일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한 뒤 단체로 평양 신사를 찾아가 허리를 숙여 절하고 있다. 국민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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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9월 9일 오후 8시. 평양 서문밖교회 본당에 전국 27개 노회에서 온 목사 86명과 장로 85명, 선교사 22명 등 조선예수교장로회(예장) 총대들이 모였다. 그 시절엔 회무를 시작하기 하루 전 저녁에 개회예배를 드렸다.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아 하루 전 총대들을 소집해 예배를 드리던 게 관행이었다.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총회였지만 이날만큼은 공기가 달랐다. 훗날 신사참배를 결의한 총회로 전해지는 예장 제27회 총회의 첫날이었기 때문이다. 며칠 후 자신들이 하게 될 치욕적인 결의를 직감해서일까. 예배 분위기는 시종 숙연했다. 당시 전체 개신교인의 수는 40만명 남짓. 이 중 70%인 28만여명이 예장 소속이었다. 감리교는 앞서 1936년 6월 제3차 연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했다. 2년 후인 38년 9월 3일엔 총리사 양주삼 목사 명의로 ‘신사참배를 거행한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총독부에 제출했다. 천주교도 일제 앞에 무릎을 꿇은 뒤였다. 27회 예장 총회엔 일제의 이목이 집중됐다. 이곳만 남았기 때문이었다.

총대들 사이에선 “이번 총회를 넘기긴 어려울 것 같다” “신사참배 결의를 할 수도 있다”는 우려가 가득했다. “드디어 결의하게 됐다”며 반색하는 이들도 일부 있었다. 복잡한 감정 속에 총회 첫날이 지나고 운명의 10일이 됐다.

이른 아침부터 중무장한 경찰이 교회 본당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강단엔 평안남도 경찰국장 등 간부들이 자리를 차지했다. 100여명의 경관은 총대들 사이에 앉아 반대 의지를 꺾었다. 묵언의 압박이었다. 신사참배를 반대하던 총대들은 터져 나오는 눈물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일제는 총회에 앞서 극렬 반대주의자였던 주기철 이기선 김선두 목사를 구속했다. 반대 기류를 완벽하게 차단하겠다는 의도였다.

오전 10시40분, 평양노회장 박용률 목사가 포문을 열었다. 박 목사는 평양·평서·안주노회 35명 노회원을 대표해 신사참배에 찬성한다는 ‘긴급 동의안’을 제출했다. 사전에 지지발언을 하기로 약속돼 있던 평서노회장 박임현 목사가 동의했다. 안주노회장 길인섭 목사가 재청했다. 일사천리였다. 더 이상의 토론이나 의견개진은 없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홍택기 총회장이 “‘가’(可) 하면 ‘예’ 하시오”라고 물었다. 통상 회의 규칙인 거부 의사를 물어보는 과정은 생략했다. 가결됐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총회장이 의사봉을 들었다. “딱딱딱”. 의사봉의 둔탁한 소리가 고요한 예배당을 갈랐다. 동시에 윌리엄 블레어 선교사를 비롯한 20여명의 선교사가 자리를 박차고 강단으로 뛰어나갔다. “안 됩니다” “불법이요”라는 외침이 끝나기도 전 경관들이 선교사들의 입을 막고 끌고 나갔다.

마지막까지 신앙의 양심을 지키던 예장 총회가 무너지는 순간은 이토록 무기력했다. 예장이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했던 건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십계명 제1조에 어긋나기 때문이었다. 일본인들이 신으로 받드는 일왕을 경배하는 행위가 하나님이 금한 행위라고 본 것이었다. 안건 자체가 긴급 동의안 형식으로 갑자기 올라왔지만 총회는 선언문까지 미리 준비했다. 선언문은 서기 곽진근 목사가 낭독했다. “신사는 종교가 아니며 기독교 교리에도 어긋나지 않는 애국적 국가 의식이기에 솔선해서 국민정신 총동원에 적극 참가하여 황국신민으로서 정성을 다해 달라.” 신사참배가 국가 의식임을 주장한 선언문이었다.

신사참배가 국가 의식이 아니었다는 건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이듬해인 1939년 9월 8일 신의주 제2교회에서 열린 예장 28회 총회의 시작은 일왕을 참배하는 일이었다. 일왕이 있는 동쪽을 향해 90도 허리를 숙여 절하는 ‘동방요배’가 예배의 자리를 대신한 것이었다. 기미가요와 ‘황국신민 서사’를 제창한 뒤에야 찬송가를 부르고 설교가 선포됐다. 설교 후엔 일본군 장병과 동양 평화를 위한 묵도도 이어졌다. 국가 의식이라던 신사참배가 예배의 일환이 된 것이다. 역사가들은 신사참배 결의보다 뒤이은 행위들이 더 큰 오점이라고 지적한다.

임희국 장로회신학대 교수는 “신사참배 결의만 했다면 일제 강점기 중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이후의 일들은 ‘자발적 결의’라는 의혹을 사기에 충분하다”면서 “이후 총회에선 예배에 앞서 동방요배를 했는데 이는 하나님 앞에 일왕을 세우는 신성모독과 같은 일”이라고 했다. 실제 이어진 총회에선 국방헌금 및 일본군 위문금 모금이 결정됐고 1942년 31회 총회에선 애국기(愛國機)라는 이름으로 전투기 헌납까지 결의했다. 일제의 침략전쟁에 투입된 그 전투기는 ‘조선 장로호’로 명명됐다.

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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