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역사여행] 말씀 접한 ‘도쿄 난민’… 고국 민중 일깨우는 데 헌신

독립운동가 서재필과 충남 논산

[한국기독역사여행] 말씀 접한 ‘도쿄 난민’… 고국 민중 일깨우는 데 헌신 기사의 사진
서재필 (1864∼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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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송재 서재필의 신앙적 삶에는 영웅적 서사가 담겼다. 그러나 한편으로 취재 내내 연민의 마음을 떨칠 수 없었다. 그의 생가와 본가가 있는 전남 보성과 충남 논산을 잇는 여정은 서재필이 가고 싶어 하지 않았던 길이기도 했다.

서재필의 삶은 화려하다. 그는 18세에 과거 급제하고 이듬해 일본 게이오의숙과 도야마육군학교에서 수학했다. 그러나 1884년 12월 4일 김옥균 서광범 홍영식 박영효 등과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미국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이후 그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제일장로교회를 배경으로 컬럼비아대학(현 조지워싱턴대학) 의학부에 입학했고 1890년 시민권을 얻었다. 두 해 뒤에 한국인 최초로 미국 의학사 학위를 받았으며 또 두 해 뒤 워싱턴DC 커버넌트교회에서 암스트롱이라는 미국 여인과 결혼, 두 딸을 낳고 개업의가 됐다.

이 뛰어난 조선의 엘리트는 김홍집 내각 추천으로 1895년 귀국해 중추원 상임고문을 맡아 국정기획을 주도했다. 독립신문 창간, 독립협회 설립, 독립문 준공, 만민공동회 개최 등 개화기 민족 지도자로서 최선을 다했다. 1922∼1945년엔 미국에서 의사로서 조용히 살기도 했다.

그는 해방과 함께 미군정이 시작되자 과도정부 특별의정관으로 임명됐다. 그 과정에서 초대 대통령에 추대되기도 했다. 하지만 고령이었던 탓에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체제와 세기, 대륙을 오가며 민족을 위해 힘써 온 그는 1977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돼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돼 있다. 그렇게 ‘화려하게’ 살았던 서재필이었으나 상처가 깊었다. 그는 두 번의 귀국 가운데서도 단 한 번도 고향을 찾지 않았다.

자신 때문에 부모, 형제, 아내, 자식이 반역 죄인으로 살해 당하고 굶어 죽었기 때문은 아닐까. 연민이 드는 이유였다.

망명가, 언더우드에게 주기도문을 배우다

서재필이 한국 초기 개신교를 언덕 삼아 혁명가로 살았건,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앙적 삶을 살았건 그걸 깊이 따질 바는 아니다. 성령의 역사는 사람이 기준점이 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 중심이기 때문에 그를 들어 쓰신 이유가 있을 것이다.

지난달 30일 충남 논산 연무읍 금곡2리 서재필가(家) 묘역은 참배객이 찾기 어려운 장소임에도 잘 관리되고 있었다. 봉분과 비석이 예사 무덤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었다. 논산시가 너른 주차장까지 조성하는 등 신경을 많이 쓴 흔적이 역력하다.

‘송재 서재필 박사 지묘’라고 쓴 비석에 색다른 이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계배(繼配)부인 샤무엘 암스트롱. 서재필이 망명지 미국에서 재혼한 부인 이름이다. 계배부인 이름 위 첫 부인은 이름조차 전해지지 않았던지 ‘광산김씨’라고만 돼 있다. 기독교가 이 땅에 전래되기 전까지 여성은 이름 석 자조차 올릴 수 없을 정도로 고된 삶을 살아야 했다.

이 광산김씨는 남편이 혁명에 실패한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독자(獨子)는 거두는 이가 없어 굶어 죽었다는 얘기가 떠돈다. 서재필의 부모 서광효와 성주이씨 역시 자살했다. 일본에서 양잠학을 공부한 동생 서재창은 형을 도왔으니 살아남을 리 없었다. 3대가 멸문지화를 당했다.

가족이 이렇게 도륙될 무렵 서재필은 필사의 탈출 끝에 박영효(1861∼1939) 서광범(1859∼1897) 등과 함께 도쿄에서 ‘난민’ 신세가 됐다. 선교사 고든 어비슨이 남긴 기록물에 그의 한탄이 잘 묘사돼 있다.

‘나는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몸 누일 자리도 없었다. 요코하마에 있는 한두 사람의 미국인(선교사로 추정)이 아니었으면 그대로 무너졌을 것이다. 나는 한국인에게 염증을 느꼈으면서도 동시에 일본에 대해서도 실망했다. 동양을 떠나서 미국에서 새로운 삶을 찾기로 했다. 박영효와 서광범이 나와 함께 있다.’

이 조선의 혁명가 세 사람은 일본 망명 기간에 전혀 예상치 않은 선교사들을 만나게 돼 도움을 받게 되는데 그들이 바로 스크랜턴(1856∼1922)과 언더우드(1859∼1916)이다. 서재필은 언더우드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대가로 영어를 배웠다. 언더우드는 그에게 영어 철자만이 아니라 주기도문을 정성껏 가르쳐 주었다. 언더우드는 특히 그들의 딱한 사정을 듣고 미국 동부에 사는 자신의 형 존 언더우드(타이프라이터 발명가)에게 연락해 보라고 소개장을 써주기도 했다. 서재필은 영어성경 공부에 매진했고 신앙생활도 열심이었다. 박영효와 서광범은 스크랜턴에게 한국어를 가르쳤다. 그 무렵 아펜젤러(1858∼1902) 역시 일본에서 스크랜턴, 언더우드 등과 함께 조선 선교를 위해 일본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세 사람은 스크랜턴과 언더우드 등의 도움으로 초신자가 됐다. 그러나 가난한 조선 청년, 그것도 외교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정치범들이 미국에 가기란 쉽지 않았다. 다행히 일본에 먼저 와 있던 개화파 인물 이수정(1842∼1886·최초 한글성서 번역자)이 나서서 일본 주재 미국 선교사 루미스, 바라, 낙스, 헵번 등을 소개했고 그들이 미 망명을 위한 신원보증인이 됐다. 미국행 뱃삯은 이수정의 소개로 교토 도시샤대학 설립자 니지마를 만나 도움을 받았다. 특히 루미스 선교사는 자신이 시무하는 시로교회 성도들에게 광고해 서재필의 재정을 도왔다.

서재필 박영효 서광범은 검으로 조선 혁명을 꿈꿨다. 스크랜턴 언더우드 아펜젤러는 말씀으로 조선 혁명을 꿈꿨다. 일본에서 만난 이들은 1885년 3월 각기 미국과 조선을 향해 떠났다. 누가 혁명가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해 5월 배편으로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서재필 일행은 여관 주인의 소개로 교회에 출석했다. 그리고 얼마 후 미국 유학 경험이 있던 서광범이 먼저 뉴저지주 러트거즈대학에 입학해 떠났고 둘만 남게 됐다. 두 사람은 샌프란시스코 제일장로교회 로버츠 장로의 도움으로 가구점에 들어가 홍보전단 돌리는 일을 했다. 가구점 사장 책상에 성경이 놓여 있었다고 서재필이 회고한 바 있다.

그들은 영어성경을 읽으며 매일매일 감사의 생활을 했다. 한데 왕족이었던 박영효는 잘 아는 일본인을 그곳에서 만나 일본으로 되돌아갔다. 서재필은 굴하지 않고 정육점원과 창고지기 등을 하며 제일장로교회를 섬겼다. 그러던 중 일본 요코하마의 바라 선교사 주선에 힘입어 미 동부 힐먼아카데미에 진학하게 됐고 제일장로교회 교인들은 송별예배로 그를 보냈다. 힐먼아카데미 설립자 홀렌백은 초신자 서재필에게 전액 장학금을 주었다.

어느 해 서재필은 홀렌백이 출석하는 교회에서 간증하게 됐다. “저는 조선을 중국 청나라로부터 벗어나 자주적인 나라를 만들려고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역적으로 몰렸습니다. 아내와 두 살 난 아들은 난리통에 죽고 말았습니다. 동지들과 일본 망명 후 미국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이곳까지 왔습니다. 하나님도 알게 됐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 뜻 안에서 이뤄진 것임을 알게 됐습니다.”

이때 서재필은 그들 앞에서 찬송가 ‘나 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을 눈물 흘리며 불렀다. 아내와 아들, 부모와 형제에게 그런 죄인이 없었다.

고향으로 머리를 두지 않았던 서재필

폭염이 기승을 부리던 한낮 논산시 은진면 은진초등학교 교정. 교문 입구에 500년은 됨 직한 느티나무 6∼7그루가 그늘을 드리웠다. 교사(校舍) 앞에는 100년이 넘은 향나무 두 그루가 보호수로 관리되고 있었다. 느티나무와 향나무 사이 운동장 마당에는 조선시대 거북석상이 자리했다. 유서 깊은 학교의 모습이다.

하지만 서재필에게는 뼈아픈 현장이다. 갑신정변 실패 후 당시 은진관아에 체포된 부모가 원옥(圓獄)에 갇혔다 끝내 숨졌기 때문이다. 그 관아마저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면서 모두 허물어졌다. 그 자리에 일제는 일본식 목재건물을 세우고 황국신민 교육을 시작했는데 그 교사 앞에는 반드시 향나무를 심었다. 지금의 향나무 두 그루다. 그런 관아 자리가 지금의 은진초교와 은진면사무소 일대다.

개화파 서재필 등은 일본의 힘을 빌려 외세를 몰아내려 했다. 망명 10년 만에 귀국해서는 민초의 힘으로 외세를 몰아내려 했다. 서재필 중심에는 늘 예수가 있었다. 약한 자에게 손 내미는 예수의 공의가 필요한 조선임을 알게 됐다. 그는 독립신문 창간, 만민공동회 설립 등으로 민중을 깨우려 했다.

서재필은 망명 후 평생을 신앙인으로 살았다. 그러나 자신 때문에 부모, 처와 자식, 형제를 먼저 보낸 깊은 상처를 치유받을 수 없었다. 고향으로 머리를 둘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서재필을 위인이라 하나 정작 그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고 고백했다.

▒ 서재필은 제사를 원했을까

서재필 생가 전남 보성에는 ‘서재필기념공원’이 조성돼 있다. 생가 복원은 물론 제사를 위한 사당까지 들어서 있다. 충남 논산 본가 지역에서도 성역화 작업이 한창이다. 본가 뒤 대나무 숲 너머 묘역에도 제사를 위한 기반 시설이 갖춰져 있다. 자기 고장의 위인을 기리기 위한 지방자치단체의 노력인 셈이다. 지자체의 그런 노력을 탓할 바는 못 된다. 정작 한국교회의 무성의함이 안타까울 뿐이다.

멸문지화를 당한 서재필은 생가 및 본가 동네 주민들이 섬겼다. 그러자 지자체가 지원했다. 만약 해당 지역 기독교연합회 등이 ‘그리스도인 서재필 추모예배’를 매년 가졌더라면 상황이 달라졌을 것이다. 서재필만의 예가 아니다. 전북 진안의 이재명 열사도 그러했다. 뜨거운 신앙인이었던 그 역시 지자체와 문중의 주자가례에 의한 제사를 받는다.

한국 근대 인물은 대개 서재필과 같은 그리스도인이 많다. 지역교회가 눈을 크게 뜨고 살필 일이다.

논산·보성=글·사진 전정희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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