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고승욱] 법원에 새살이 돋으려면 기사의 사진
‘우리에게는 스스로를 올바르게 할 능력이 있다.’ 지금 법원의 모습을 보면 법관들은 이 말을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듯하다. 안철상 법원행정처장은 지난달 31일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특별조사단이 확보한 문건 410개 중 공개하지 않았던 196건을 추가 공개하면서 “다시는 국민을 위한 재판에 역행하지 않겠다는 다짐”이라고 말했다. 그는 “사법부 구성원 모두가 겸허한 자세로 재판을 통해 정의를 실현하겠다는 약속”이라는 말도 했다.

하지만 실제 상황은 약속과 다짐을 되새긴 안 처장의 말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진행되는 중이다. 법원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 박병대 전 법원행정처장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을 기각했고 ‘부산 스폰서 판사’ 사건 관련 압수수색 영장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외교부와 법원행정처의 거래 의혹을 확인하기 위해 청구된 압수수색 영장은 절반만 발부됐다. 검찰은 거세게 반발했고 법원의 제 식구 감싸기를 비난하는 여론이 비등했다. 법원에서 일하는 직원이 내부 게시판에 “참고인(외교부)에게 영장을 발부하면서 범죄자(법원)에게는 범죄를 은폐할 기회를 줬다”는 글을 올렸을 정도다. 그는 영장전담 판사를 향해 “퇴근 후 거울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라”고 충고했다. 헌법에 명시된 ‘법관의 양심’을 추궁한 것이다. 누구의 말이 옳은지를 떠나 법관이 이런 말을 듣고, 많은 사람이 공감한다는 것 자체가 사법부의 수치다. 법관들은 스스로를 올바르게 할 수 있다고 믿는지 모르지만 법관을 제외한 대다수가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법원행정처가 판사들의 전문분야 연구회 중복가입 금지를 공지한 게 지난해 2월이다. 처음에는 이 조치가 법원 내 진보·보수 성향 판사들의 갈등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았다. 보수 진영은 국제인권법연구회 소속 판사들에게 극도의 경계감을 보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야기가 달라졌다. 판사들의 성향과 동향을 파악한 블랙리스트 의혹을 밝혀내는 과정에서 우여곡절을 거쳐 법원행정처 PC가 일부 열렸고,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은 대법원의 재판 거래 의혹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제 이 사건의 핵심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이끌던 사법부가 상고법원 신설이라는 숙원사업을 해결하기 위해 청와대, 국회와 주요 사건 재판을 놓고 거래에 나섰는지를 확인하는 일이 됐다.

판사가 승진 또는 해외근무를 위해 법과 양심에 반해 재판을 했다는 극단적인 논리에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우리나라가 그 정도로 미개한 사회는 아니다. 무슨 영광을 얻겠다고 그렇게까지 하겠느냐는 말이 훨씬 상식적이다. 하지만 ‘판사 개인’ 대신 ‘판사 집단’이라는 말이 들어가면 어떨까. 재판 결과에 영향을 주지 않는 미세한 조정은 판사의 재량권이다. 당장 개인의 이익을 위해 양심을 버리는 일은 결코 없어도 조직의 발전을 위해서라면 조금 신경을 쓸 수 있다. 고생하는 후배 법관들을 위해 잘못된 제도를 신속하게 바로잡겠다는 사명감, 근거도 없는 악의적인 비난 여론으로부터 법관들을 보호하겠다는 배려심이 예상치 못한 부적절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지금 드러난 것은 집단 이기주의의 폐해일지 모른다.

사실 사상 초유의 재판 거래 의혹이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지 예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적절한 수준의 진상규명이 이뤄지고, 특정인의 구체적인 위법 사실과 단죄보다는 미래 사법부의 변화될 모습에 긍정적 방점이 찍힐 것이다. 그런 점에서 국민을 위한 재판에 역행하는 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안 처장의 다짐은 유효하다. 하지만 그것이 사법부에 대한 잃어버린 신뢰를 되찾는 길은 결코 아니다. 상처의 죽은 세포를 그대로 두면 새살은 결코 돋지 않는다. 재판 거래 의혹은 실체가 있는지 없는지 증명되지 않았지만 누군가에게 정의롭지 못한 돈을 벌게 해주는 전관예우와 다를 게 없다. 음울한 유령이 돼 법원 주위를 배회할 것이다. 공정한 재판은 공동체 존립의 마지막 보루임을 모를 리 없을 텐데 안타깝다.

고승욱 편집국 부국장 swk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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