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톺아보기] 신사참배 회개, 삶의 변화로 이어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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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창일 기자
1938년 9월 11일은 조선예수교장로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한 날이다. 이에 앞서 감리교와 성결교를 비롯해 천주교까지 신사참배에 참여했다. 신앙의 마지노선으로 여겨지던 장로교마저 무너진 것이다. 신사참배는 일본인들이 신으로 여기는 ‘천황’에게 복종한다는 의미로 많은 반발을 샀다. 1937년 들어서면서 황국 신민화와 민족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일제의 강한 압박이 시작됐다. 한반도 방방곡곡에 2개의 신궁과 1062개의 신사가 세워진 것도 이때였다. 결의는 이런 압박의 끝에 있었다.

하지만 결의는 시작일 뿐이었다. 한번 틈이 생긴 둑은 빠르게 무너졌다. 적극적인 부역행위가 이어진 것이다. 전국 교회를 대상으로 국방헌금을 걷기 시작했고 장병을 위한 기도회, 시국강연회, 전승축하회, 위문행사가 줄줄이 열렸다. 장로교의 경우 기도회만 8953회 진행했을 정도였으니 일제 말 교단들의 부역행위가 극에 달했다는 걸 알 수 있다.

1942년엔 전투기 1대와 기관총 구입비를 헌납했다. 훗날 전투기의 이름은 ‘조선장로호’로 명명됐다. 1942년 열린 제41회 정기총회에선 교회 종 1540개와 유기 2165점을 모아 12만원을 마련했다. 감리교의 물량공세는 장로교를 압도했다. 1944년 감독회의에서는 전투기 3대를 구입할 수 있는 21만원을 헌납하기로 결정했다. 전투기의 이름은 ‘감리교단호’였다. 이 돈을 마련하기 위해 교회를 대상으로 특별헌금을 걷었고 가까운 지역에 있는 교회들을 병합한 뒤 부동산을 처분하는 방법으로 기금을 조성했다.

수많은 목사와 장로들이 신사를 찾아 허리를 숙였다. 단순히 머리를 숙인 데 그치지 않고 허리를 90도로 굽혀 참배했다. 부역을 독려하기 위해 전국을 돌며 강연했던 지도급 인사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 중 대부분은 부역을 했다는 이유로 처벌받지는 않았다. 해방 직후 만들어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연행된 목사들은 대부분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극히 일부가 징역형을 선고받았지만 대부분 교계로 복귀했다.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목회자들이다. 이들은 교단의 지도자로 일생을 마쳤다.

물론 친일 부역의 파고 속에서도 신앙의 절개를 지킨 이들이 적지 않았다. 주기철 목사, 김윤찬 목사, 신석구 목사, 이현속 장로 등이 순교의 피를 뿌렸다. 이외에도 무수히 많은 이들이 투옥되고 목숨을 잃었다.

신사참배를 결의한 지 80주년이 됐다. 최근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 결의를 통해 신앙과 목숨을 거래한 이들의 죄를 후배들이 대신 회개하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반드시 회개해야 한다. 하지만 회개는 삶의 변화가 수반돼야 한다. 과연 2018년, 현재를 살아가는 목회자들에게 우상은 없을까. 복음의 삶을 가리는 우상을 거두는 일,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회개로 나아가는 첩경이다.

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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