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소금-송세영] 한국교회와 3·1 운동 기사의 사진
내년이면 3·1운동 100주년이다. 비폭력 저항의 정신으로 시작된 3·1운동은 세계사적 의미를 갖는다. 같은 해 5월 중국에서 전개된 5·4운동의 도화선이 되는 등 제국주의 침탈 아래에 놓여 있던 약소국과 식민지 각국의 저항운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3·1운동의 비폭력 저항 정신은 지난해 서울 광화문 촛불집회에서 재현됐다. 국내외 언론은 수많은 인파가 모인 촛불집회가 도심 한복판에서 평화적으로 진행된 것을 경이롭게 바라보며 높이 평가했다. 당시 시위대가 촛불 대신 화염병과 쇠파이프를 들었다면 비극적인 유혈사태로 번졌을지 모른다.

한국 교회사에서도 3·1운동은 기념비적 사건이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명의 민족대표 가운데 16명이 개신교 대표였다. 나머지 대표 중에는 불교가 2명, 천도교가 15명이었다. 2개월여 동안 전국적으로 번진 만세운동의 거점도 교회와 미션스쿨이었다. 유관순 열사 등 숱한 청년 기독인들이 옥고를 치르고 목숨을 잃었다. 제암리교회처럼 집단 학살의 피해를 입은 곳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 주위엔 3·1운동의 의미를 과소평가하는 이들이 많다. 만주를 중심으로 전개된 항일무장투쟁이나 총과 폭탄으로 친일파나 조선총독부 인사들을 공격한 것만이 제대로 된 독립운동이었다는 인식을 가진 이들이 주로 그렇다. 일부는 3·1운동이 비폭력 저항을 표방함으로써 항일무장투쟁의 성장을 방해했다는 왜곡된 인식까지 갖고 있다.

민족대표 33명의 역할을 폄훼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3·1운동의 주역은 전국 각지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한 민초들이었고 민족대표들은 성명서를 낭독한 뒤 스스로 잡혀간 것 외에는 한 일이 없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민족대표들이 모두 종교계 인사였고 개신교가 가장 많았다는 점, 서구 문명국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비주체적인 자세를 보였다는 점도 부정적 평가에 한몫을 하고 있다.

이런 시각이 역사적 지식의 결핍과 결합되면 가짜뉴스가 탄생한다. 대표적인 게 민족대표 33인 대부분이 변절했다는 것이다. 실제로는 33명 중 최린 박희도 정춘수 3명만 변절했다. 5명은 독립운동을 했는지 친일을 했는지 행적이 불분명하지만 나머지는 독립운동을 이어가다 숨지거나 옥고를 치렀다.

3·1운동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교정하려면 당시 국내외 정세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필요하다. 일본은 1918년 끝난 제1차 세계대전의 전승국이었다. 국력은 물론이고 군사력도 서구 열강과 어깨를 같이하려 할 때였다. 게릴라전이 아닌 대중적 무장투쟁은 무모한 일이었다. 멀리 내다보면서 민족 내부를 통합하고 주체적인 역량을 키우는 동시에 여론전과 외교전을 통해 독립에 유리한 국제적 여건을 조성하는 게 효과적인 전략이었다.

이는 3·1운동이 일회성 사건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식민지 조선은 3·1운동을 통해 비로소 국제적인 존재감을 갖게 됐고 중국 항일운동 세력의 지지와 연대를 확보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국 상하이에서 수립돼 이곳저곳을 옮겨가면서도 광복까지 이어져올 수 있었던 동력 중의 하나가 3·1운동에 있었다.

한국교회의 역사인식에도 아쉬운 점이 많다. 제대로 알지 못하면 한국교회가 3·1운동을 주도했다는 자부심도, 그 정신을 계승해야 한다는 역사의식도 갖기 어렵다. 민족대표 33명 중 한 분이었던 신석구 목사 역시 한국교회에선 사실상 잊힌 인물이었다. 신 목사는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후에도 독립의지를 꺾지 않았다. 신사참배를 거부해 혹독한 고초를 겪다 광복을 맞이했으나 월남을 거부하고 북한에 남았다가 6·25전쟁 때 순교했다. 기독교대한감리회는 신 목사의 삶과 신앙을 바로 알리기 위해 평전 ‘출이독립’을 출간하고 독후감 쓰기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참 뜻 깊은 일이다.

오는 15일은 제73주년 광복절이다. 신 목사 외에도 신앙인으로서 독립을 위해 헌신한 분들이 많다. 한국교회의 3·1운동 바로 알기 운동이 더 확대됐으면 좋겠다.

송세영 종교부장 sysoh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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