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안녕하세요 기사의 사진
“별일 없으시죠? 없음이 안녕이 되는 날이에요.” 이렇게 시작하는 편지를 쓴 적이 있다. 아침에 귀가 깨어나자마자 들려오는 수백여 사건사고가 일어나는 곳에서 별일 없이 하루를 맞이하고 하루를 보내는 것 자체가 안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인사를 건넨 것 같다. 그 후로 부쩍 ‘안녕’이라는 단어를 많이 생각했다. 과연 우리는 안녕할까. 어쩌면 우리가 안녕한지를 물을수록 오히려 이 시대가 안녕의 부재를 드러내고 있음을 방증하는 것은 아닐까.

요즘 구약성경 열왕기하를 읽으면서 이스라엘에서 바알 숭배를 제거한 예후의 개혁을 주목하게 되었다. 예후가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부음 받은 후 아합 가문을 완전히 일소하는 과정이 그려진 열왕기하 9∼10장에 유독 “평안하냐?”는 물음이 많이 등장한다. 반란과 보복 그리고 살해의 피비린내 나는 현장에서 가장 많이 울려 퍼진 단어가 역설적이게도 “안녕”에 대한 물음이었다. 하지만 안녕하세요? 별일 없으시죠? 라는 물음에 예후는 지금 어떻게 평안할 수 있냐고 되물으며 지금은 평안의 안부를 물을 때가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따라 심판해야 하는 때임을 말과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예후는 실제로 아합 가문을 진멸함으로써 아합에게 토지를 빼앗기고 억울하게 죽은 나봇의 피와 그의 아들들의 피를 갚아줄 것이다.(왕하 9:26) 그런데 여기서 ‘갚는다’는 단어가 ‘평안’이라는 말과 동일한 어근에서 파생됐고, 그 뜻은 ‘균형이나 조화를 이룬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아합과 이세벨이 나봇의 것을 빼앗아 탐욕의 배를 채움으로써 나봇을 죽게 했으니 이제 그들이 빼앗은 그 토지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게 될 것이며, 그때 비로소 평안이 이뤄진다는 것이다. ‘평안’이라는 인사말 속에 담긴 이 균형과 조화를 생각할 때, 우리가 건성으로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를 쉽게 건넬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안녕한 사회, 안녕한 가정, 안녕한 교회, 안녕한 공동체를 갈망한다면 반드시 거기엔 먼저 공평과 정의가 이뤄지고 있어야 한다. 당장 내 배를 채우기 위해 다른 사람의 입에 들어가야 할 것을 가져오고, 내 하루의 안전을 위해 다른 사람의 내일을 불안하게 한다면 거기엔 안녕이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 평화라는 단어에 쌀을 공평하게 먹는다는 뜻이 있는 것처럼, 안녕한 곳에는 너도 나처럼 내가 바라는 것처럼 최소한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것처럼 너도 그러하기를 원하는 소망이 담겨 있는 것이다.

놀랍게도 아합과 이세벨이 나봇의 토지를 빼앗은 일은 자기들의 무덤, 곧 자기들의 지옥을 빼앗은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결국 그들의 시체가 거기에 거름처럼 뿌려졌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나의 천국, 나의 안녕을 위해 다른 사람의 삶을 지옥으로 만드는 행위는 실은 내 지옥을 빼앗아 놓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내가 오늘 누군가를 고통스럽게 했다면 그것은 내일 내가 마땅히 받을 고통을 미리 저금해놓는 것이며, 내가 누군가를 경멸했다면 그것은 내가 받을 경멸을 완벽하게 확보해 놓는 것이다. 혹시 내가 욕심을 부리는 동안 다른 사람의 안녕이 위태로운 것은 아닌지 정신을 차리고 돌아볼 일이다.

오늘도 “별일 없으시죠?” 인사를 건네면서 정말 별일들이 없으면 좋겠다. 기독교 사상가 유영모 선생의 말씀 중 “더럽다는 것은 덜 없다는 것”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없음이 덜한 곳에 더러움이 있고, 더러움으로 어수선하고 시끄러우니 거기 안녕이 부재한 것이다. 무엇을 더 갖고 누리고 싶어서 안달하는 마음이 안녕할 리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극적인 심판 앞에서 “별일 다 있네”라는 탄식이 나오기 전에 “별거 다 있는” 복잡한 삶부터 정리할 필요가 있겠다. 먼저는 나의 안녕을 위해서라도 ‘더 없음’을 연습하다 보면 너에게는 ‘더 있음’을 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다 보면 너의 안녕이 조금이라도 더 확보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약력=△침례신학대학교 신학과 △침례신학대학교 대학원 기독교교육학 석사 △매일성경 편집장 △성서유니온 출판국장 △시집 ‘좋게 나쁘게 좋게’

김주련(성서유니온선교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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