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한국 대중음악을 관통하는 대표곡 ‘동백아가씨’ 기사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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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희준의 ‘우리 애인은 올드미스’와 한명숙의 ‘노란 샤쓰의 사나이’가 1960년대의 개막을 알리는 팡파르였다면, 60년대 한국 대중음악사 전체를 관통하는 단 한 곡의 대표곡을 꼽는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이미자의 ‘동백아가씨’가 될 것이다. 59년 ‘열아홉 순정’의 히트로 본격적인 가수의 길로 들어선 스물넷의 젊은 여성이 고만고만한 스타에서 64년 일약 여왕의 왕좌에 등극하는 신데렐라 스토리만으로는 ‘동백아가씨’가 분만한 신드롬의 정체를 설명하기 어렵다.

단순한 음악적 구조에 이별과 그리움의 정한을 담은 이 전형적인 애가(哀歌)의 뒤엔 ‘박정희 시대’로 요약할 수 있는 60년대의 정치 외교 경제 사회 문화의 착종과 혼란이, 그리고 그 착종과 혼란의 고단한 심미적 퇴행이 드리워져 있다.

4·19의 피로 마침내 움켜쥔 민주주의의 희망은 60년 8월 장면 내각 출범과 함께 표류하기 시작했다. 12년 장기 독재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한 내각제로의 개헌 자체는 문제가 없었지만, 이승만 체제 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을 꺾은 적 있는 장면을 총리로 내세운 집권 민주당은 이 기회를 현실적으로 승화시킬 정치적 역량이 부재했다.

제2공화국의 개정 헌법은 4·19의 민주주의 정신을 오롯이 담았다. 국민의 기본권을 강화하고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제한하는 법률의 제정을 헌법으로 배제했다. 지방자치제를 도입했으며, 경찰의 정치적 중립화를 제도화하고자 했다.

개정된 헌법으로 치러진 60년 7월의 5대 총선은 이승만 자유당 청산의 바람과 민주주의에 대한 높은 기대감으로 무려 84%가 넘는 높은 투표율을 기록했다. 그리고 민주당은 민의원(하원에 해당) 233석 중 무려 175석을 장악했다. 상원에 해당하는 참의원 선거에서도 58석 중 31석을 차지했다. 민의원 175석은 의석의 75%를 석권한 압승이었으며 무소불위의 일당 독재까지 가능한 수치였다.

하지만 처음으로 권력을 잡은 집권 민주당의 정치적 역량은 4·19로 고조된 민심의 수준에 한참 못 미쳤다. 거대 야당이 된 이들은 신·구파로 쪼개져 주도권 싸움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면서 개혁의 골든타임은 안타깝게 끝나가고 있었다.

해방 직후 친일 지주 계층의 이해를 대변했던 한민당을 뿌리로 한 구파는 장면을 필두로 하는 신파의 발목을 사사건건 잡았다. 결국 구파가 신민당으로 분당해 나감으로써 여당은 동력을 급속히 잃었다. 게다가 고작 9개월의 집권 기간 동안 무려 세 차례의 전면 개각의 혼돈에 휘말린 장면 내각은 외교와 경제, 그리고 정치 분야에서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른다.

과도한 친미정책은 대미 굴욕 외교로 이어졌다. 환율 인상 압력에 굴복했다. 이와 함께 시행한 일본 상품 수입허가 조치는 이제 막 발걸음을 떼려던 국내 산업의 경쟁력을 초토화시켰다. ‘경제개발 제일주의’를 천명했지만 그것은 허공의 메아리로 사라졌다. 물가는 폭등하고 실업률은 23%를 넘어섰다. 언제나 문제는 경제였다. 실망은 분노로 발전했다. 게다가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반공법과 데모규제법을 입안하려는 패착까지 두게 되자 시민들은 다시 거리로 나와 ‘장면 내각 타도’를 외쳤다. 2대 악법 반대투쟁은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시민투쟁에 굴복한 장면 내각은 식물 정권으로 전락했다. 결국 두 달 뒤 일어난 군사 쿠데타를 진압할 시도조차 하지 못한 채 군인들의 무혈입성을 지켜봐야 했다. 민심이 국정의 문란과 고질화된 부패, 부의 편중에서 벗어나지 못한 장면 정부를 버린 것이다.

나중에 박정희의 정적이 되는 장준하마저도 5·16을 ‘불행하지만 불가피한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했으니 제2공화국은 변명의 여지가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장준하가 기대했던 4·19 정신의 계승과 조속한 민정 이양의 꿈은 간단하게 무산된다.

장교 집단은 군복을 벗고 민간복으로 갈아입은 뒤 무소불위의 권력을 이후 18년간 휘두르게 된다. 이들의 ‘구국의 일념’은 권력의 장악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63년 민주당 구파의 대표적인 인물인 윤보선을 15만표 차로 간신히 이기고 대통령이 된 박정희는 자신의 정치적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서 경제개발에 올인할 수밖에 없었다. 그 종잣돈을 확보하기 위해 일본 정부에 한·일 국교 정상화와 맞바꾸는 경협자금을 요청하면서 정국은 다시 소용돌이친다.

64년 봄, 박정희정부가 한·일회담의 방침을 공표하자 학생과 야당들은 일제히 ‘대일 굴욕외교 반대’를 외치며 범국민투쟁위원회로 결집했고, 훗날 ‘6·3 항쟁’이라고 불리게 되는 대규모 시위를 벌이게 된다. 이들은 군사정부의 ‘민족적 민주주의’의 허구성을 공격하고 ‘5·16은 4·19의 민족 민주 이념을 부정하는 군사 쿠데타에 불과하다’는 규정을 내린다. 한·일회담 반대와 박정희 정권 퇴진 시위가 전국화된 6월, 박정희정부는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대대적인 탄압을 개시해 400명에 가까운 민주인사들을 구속하기에 이른다. 이 투쟁은 한·일회담이 체결되는 이듬해까지 이어졌지만 박정희 정권의 철권통치 앞에 패배한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꼭 20년 만에 일본은 이렇게 다시 한반도의 남쪽에 돌아온다. 이 한·일회담이 식민지 역사를 돈 몇 푼에 팔아먹은 굴욕적인 청산인지, 혹은 경제적 비상의 시발점인지를 두고 진보와 보수는 여전히 논쟁 중이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중요한 것은 창씨개명과 친일부역의 경력을 지닌 최고 통치자와 그 그룹의 친일적 성향과 일본의 외교적 복권이 한국 대중문화에 미친 영향이다. 일본이 다시 한번도로 컴백하면서 (절대다수 시민들의 반일 감정에도 불구하고) 일본 취향의 문화가 부상 혹은 부활하는 것은 주목할 만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승만 정권은 친일적 행적을 가진 이들을 정치적 기반으로 삼았으면서도 반공과 반일이라는 양대 국시를 상징적으로 지닌 정권이었다. 일본과의 수교는 말할 것도 없고 민간 차원의 교류 또한 불가능했다. 일장기가 공식적으로 한반도의 하늘 아래 휘날리는 것을 용인할 수 없다는 이유로 54년 스위스월드컵의 ‘홈 앤드 어웨이’ 방식의 최종 예선전 두 게임 모두를 일본에서 치러야 했을 정도였다.

따라서 한국 대중음악 역사상 최초의 주류 장르인 식민지 시대의 트로트는 이승만 정권 하에서 나날이 그 영항력이 축소됐다. 반면 한국전쟁 직후 쏟아지기 시작한 미국 중심의 새로운 음악 문화는 새 주도권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트로트는 서서히 주변 장르로 밀려나고 있었다. 하지만 5·16이 일어나고 한·일 국교 정상화가 이뤄지면서 일본의, 그리고 일본에 뿌리를 둔 대중문화가 64년 일거에 부상한다. 그 두 상징적인 작품은 영화 ‘맨발의 청춘’과 이미자의 공전절후의 히트곡 ‘동백아가씨’다.

신성일 엄앵란의 두 청춘스타에 트위스트 김(김한섭)까지 가세한 ‘맨발의 청춘’은 64년 봄 전국의 극장가를 강타했다. 신분이 다른 남녀 주인공의 동반 자살로 끝나는 이 작품은 일본의 나카히라 코우 감독의 ‘진흙투성이의 순정’을 거의 그대로 표절한 작품이었다(논란이 일자 영화사 측은 일본 원작자의 허락을 얻었다고 궁색하게 변명했다). 영화와 동명의 주제가는 가수 최희준이 불렀는데 이 또한 ‘우리 애인은 올드미스’를 능가하는 성공을 거둔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성공은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다. 역시 신성일 엄앵란 주연의 영화 주제가였던 이 노래는 영화를 뛰어넘어, 아니 한국 대중음악사를 새로 쓰는 엄청난 성공을 거둔다.

35주간 인기 순위 1위를 놓치지 않았으며 비공식 추산으로 64년에만 25만장에 달하는 판매고를 올렸다. 100만장을 돌파했다는 주장도 많다. 3000장 팔리면 ‘대박’이었다는 당시 음반시장 상황을 감안한다면 거의 신화적인 판매고라고 할 수 있겠다.

이 노래에서 이미자는 이난영에 의해 확립된 트로트 창법의 완벽한 완성도를 보여준다.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음정, 함부로 주관화되지 않는 발성의 절제력에서 기인하는 소리의 카리스마, 저역에서 고역까지 꽉 찬 소리의 응집력은 대중의 가슴 한복판으로 날아와 꽂혔다. 하지만 그 성공의 표피 뒤에 숨은 의미가 더 중요하다. 이 노래의 조성 체계와 리듬 패턴은 엔카의 직접적인 영향 아래 있었던 식민지 시대 오리지널 트로트 문법의 부활이라고 할 수 있다. 해방 이후 트로트가 멜로디와 리듬 모두 급속히 서구적 요소로 바뀌고 있었음을 상기한다면 이 노래는 어쩌면 ‘정통의 복원’이라고 해도 될 만큼 파격적인 리턴이었다.

이 노래는 65년 정부의 느닷없는 ‘왜색가요’ 사냥에 걸려들어 방송금지처분을 받는다. 뒤이어 음반까지 판매 중지되는 폭력을 당한다. 이것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한·일회담으로 돌아선 민심과 자신의 친일 경력을 희석시키기 위해 희생양 놀음을 한 것이다. 결국 이 노래는 87년 6월 항쟁 이후 해금될 때까지 무려 22년간 금지의 사슬에 갇혀 있어야 했다.

비틀스가 미국 음반시장을 휩쓸던 64년 이미자의 노래는 한국 음반시장을 ‘싹쓸이’했다. 이 와중에 신중현의 에드-훠 데뷔음반은 비명도 질러보지 못하고 어둠 속에 묻힌다. 정치적인 혼란과 경제적 빈곤에 지친 64년, 대중은 왜 이 노래를 선택했을까? 어쩌면 대중은 미래에 대한 희망 고문에 지쳐 과거로 무의식적 퇴행을 했던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강헌<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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