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손수호] 국화와 향 기사의 사진
제목을 보고 일본 이야기를 하는가 싶을 것이다. 루스 베네딕트의 책에서 이름과 운율만 빌렸다. 향은 동서고금의 중요한 의례에는 꼭 등장한다. 죽음의 의식에는 필수적이다. 국화는 일본에서의 의미와 달리 수수한 모습으로 추모의 공간을 엄숙하게 꾸미는 데 제격이다. 제단화나 화환 모두 국화다. 오늘은 이 국화와 향이라는 물건을 통해 우리의 장례문화에 대해 가볍게 논의해 보고 싶다.

향은 초혼의 의미가 있긴 하지만 나쁜 냄새를 없애는 실용적 성격이 강하다. 병풍 뒤에서 배어나는 이 고약한 냄새를 완화하기 위해 향을 쓰고, 향기가 강한 국화로 관을 꾸민다. 요즘같이 더운 어느 여름, 상여를 따르다가 산길 오르막에서 관 속의 분비물이 흘러내리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상두꾼이나 상주 모두에게 고역이었다. 지금은 대부분 냉장실에 위생적으로 안치되어 있는 동안 빈소에는 위패와 영정만 있다. 그런데도 조객들은 매번 향을 사르고 국화를 올려놓는다. 헌화와 분향을 함께하는 부류도 있다.

그러나 장례식장의 향은 수명을 다한 것 같다. 빈소는 대체로 지하실의 밀폐된 공간에 마련되는데, 예전의 농촌 가옥과 달리 향냄새가 빠져나가지 않아 호흡을 힘들게 한다. 그래서 조문객이 퇴장하는 것을 기다렸다가 재빨리 꺼버리는 경우도 보았다. 이에 비해 국화는 아직 향기롭다. 다만 방향이 문제다. 꽃송이가 영정 쪽으로 가게 하고 뿌리를 반대쪽으로 놓아야 한다. 향기가 사자(死者)에게 가는 것이 순리다. 근래 TV에서 노회찬 의원을 조문하는 장면을 보니 대부분 거꾸로다.

빈소의 또 다른 딜레마는 절이다. 절은 큰절과 반절로 나뉜다. 많은 사람이 큰절로 재배(再拜)하지만 종교적 이유로 망자에게는 반절, 상주에게는 큰절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그도 저도 아닌 사람은 눈치를 본다. 영정 앞에 십자가가 있으면 반절, 향로가 있으면 큰절이다. 상주와 맞절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조문객과 상주가 서로 상대의 예법을 존중하는 과정에서 한동안 어색하게 서 있는 풍경도 나온다.

단체 조문은 더욱 혼란스럽다. 직장의 부서원들이 한꺼번에 와서 세 줄을 선다. 부서장의 헛기침에 따라 절을 시작했는데, 이런 집단행동에는 사규의 정함도 없으니 각자의 선택에 따른다. 어떤 사람은 큰절을, 어떤 사람은 반절을 한다. 이러다 보니 시간차가 생겨 꾸불꾸불 라인이 무너지고 빈소는 수선스러워진다. 앞줄의 치마 입은 여자가 반절을 하고 뒷줄의 남자가 큰절을 할 때는 보기에 민망하다.

문상은 꼭 직접 해야 할까. 조문은 위로와 부조의 두 성격이 결합돼 있다. 가족을 잃은 슬픔을 함께하면서 목돈이 드는 장례비용의 일부를 돕는다는 취지다. 요즘에는 이 두 가지를 분리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같은 공간을 쓰는 동료이거나, 가족끼리 교류하는 사이라면 직접 조문하되, 업무로 알게 된 사회적 관계는 부조에 집중하는 식이다. 바람직한 일이다. 그게 장례의 번잡함을 덜고 사회적 낭비도 줄인다.

부조 금액으로 고민하는 사람도 많다. 경조비 역시 등가(等價)의 원칙과 소득기반이라는 두 기준이 있다. 전자는 주고받음의 양이 같아야 한다는 것이고, 후자는 소득에 따라 상대적이라는 생각이다. 여기에다 친부모와 시부모(혹은 빙부모)의 사례를 구분하는 쪽도 있다. 이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선택이다. 그러니 그 차이에 따른 결과에 대해서도 각자가 정리할 수밖에 없다.

상례가 혼란스러운 것은 삶의 근본이 흔들린다는 뜻이다. 모든 의례에 통일된 양식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 사회에서 한 인생을 추념하는 형식이 이렇게 무질서해도 괜찮은가 싶다. 오랜 풍속을 쌓아온 문화민족의 일원으로 때론 부끄럽고 황망하다. 중견기업으로 성장한 상조회사들이 심포지엄이라도 열어 상례에 대한 중심과 가닥을 잡아나가길 권한다.

손수호 객원논설위원·인덕대 교수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