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산책] 기억의 탁본 기사의 사진
서도호 ‘Reflection’. 직물,스테인리스스틸. Lehmann Maupin gallery
그곳에 들어간 관람객은 쉽게 나오지 않는다. 미술관 한 공간을 환상적으로 바꿔놓은 작품이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기 때문이다. 옷깃을 여미고, 작품을 찬찬히 둘러보는 감상자들의 숨소리만 이어진다. 서도호(1962∼)의 설치작품 이야기다. 수십개의 런던 테이트모던 전시실 중 서도호의 ‘계단’이 설치된 방은 관람객들이 가장 오래 머무르는 공간으로 유명하다. 공중에 매달린 붉은 계단은 서도호가 뉴욕 유학 시절 거주하던 아파트의 좁은 계단을 얇은 천으로 재현한 것이다.

일본 도쿄도(東京都)현대미술관에 설치된 ‘Reflection(투영)’이란 작품도 마찬가지다. 관람객들이 좋아하는 작품 중 하나로, 눈을 찌를 듯한 현대미술품을 휙휙 둘러보다가 이 ‘푸른 문’ 앞에만 서면 걸음을 멈춘다. 한옥의 솟을대문을 연푸른 직물로 치환한 작품은 오늘날 서도호를 세계적 작가로 우뚝 서게 했다.

작가는 비석, 기와에 새겨진 글씨를 종이에 뜨듯 ‘집’을 탁본한다. 집뿐이 아니다. 자신이 머물렀던 공간의 문고리, 수도꼭지 같은 것도 탁본한다. 한동안 머물렀던 집과 매일 만지고 썼던 기물을 탁본 뜨듯 천으로 재현하는 것은 그것들에 많은 기억과 삶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서도호는 특정 공간에 축적된 사람들의 역사, 추억, 에너지를 다른 곳으로 옮김으로써 공간과 인간, 나와 타자, 안과 밖을 새롭게 관계 맺게 한다. 나의 공간이 또 다른 공간으로 이동해 타자와 만남으로써 그 추억과 에너지가 공유되고, 전이되는 것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움직이는 집’을 선보였던 작가는 작업의 지평을 넓히며 전 세계를 누비고 있다. 미국의 월스트리트저널은 서도호의 독창적인 작업을 높이 평가하며 2013년 ‘올해의 혁신예술가’로 선정하기도 했다.

이영란 미술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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