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손영옥] 잔소리하는 국가라야 기사의 사진
“여보, 화재래!”

아닌 밤중에 홍두깨였다. 남편도 나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눈을 떴다.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입주민은 안전하게 비상구로 대피해주시기 바랍니다.”

금속성이라 더 불안하게 들렸던 기계음의 안내방송. 한 번도 아닌, 두 번이다. 그러니 불이 난 건 분명했다. 우리 집은 26층 아파트의 14층. 위로 가야 하나, 아래로 가야 하나? 뭘 챙겨야지? 가족사진? 비상연락용으로 스마트폰은 있어야겠지? 열기에 오래 버티려면 삼복더위라도 긴팔 옷을 걸쳐야 할 거야. 아 참, 타월? 질식사가 더 많다니 코를 막는 게 중요하잖아. 전기는 차단해야 하나? 아냐, 그건 지진 때 대피요령이었잖아!

그 잠시, 몸은 허둥대고 생각은 두서없었다. 그때 창밖을 내다보며 살피던 남편이 말했다. “근데, 옆 동(棟)인 거 같아!” 현관문을 밀고 나가니 층마다 소란스러운데 사태 파악이 된 듯 목소리들은 급박함이 가신 상태였다. 누군가 1층 소화전을 잘못 건드려 자동적으로 화재 대피 안내방송이 나갔다고 한다.

불과 5분여 사이에 화재 해프닝이 됐지만 실제 사고였다면, 하고 생각하니 아찔했다. 언론에 소개된 ‘○○아파트 화재…일가족 3명 중태’라는 안타까운 사고가 바로 옆 동에서 벌어졌던 것이다. 원인은 에어컨 과열로 추정된다니 100년 만의 폭염에 집집마다 에어컨을 껴안고 사는 요즘, 비슷한 화재 사건이 되풀이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재난 한국의 상징인 세월호 사건 이후 4년이 지났다. 그 사이에도 참사는 반복됐다. 15명의 사망자를 낸 인천 영흥도 낚싯배 전복 사고, 29명이 희생된 충북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 사고, 37명이 사망한 경남 밀양 세종병원 화재 사고…. 대규모 지진도 두 차례 일어나 한반도 대지진의 전주곡 아니냐는 불안이 잠복해 있다.

작가 구병모는 소설집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문학과지성사)에서 재난이 일상화된 한국 사회를 냉소적으로 그렸다. 나 역시 이번 화재 사고 해프닝처럼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빌면서 살아야 하는 것인가. 문득, 내 몸은 재난에 대처하기 위한 어떤 훈련도 받지 못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문재인정부는 ‘안전 대한민국’을 내걸었지만, 지금까지 어떤 재난 대피 훈련을 받아 본 적이 없다. TV 예능 프로그램의 재난 대피 지식에 매달리는 게 내 자구책의 전부다. “국가는 뭘 해 준거야”라는 신경질이 나왔다. 몸의 기억은 일촉즉발의 위기 때 중요하다. 그래서 공연도 몸이 기억하라고 리허설을 하는 것이 아닌가.

국가가 그런 시시콜콜한 일까지 해야 하느냐는 반론이 있겠지만, 가슴 쓸어내린 경험을 하고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상업적 돈벌이가 되지 않는 그런 일을 국가가 아니면 누가 하겠나. 생각은 꼬리를 물어 요즘 논란이 된 ‘먹방 규제’ 이슈로 뻗었다.

보건복지부는 지난달 24일 국가 비만 관리 종합대책을 발표하면서 폭식 조장 미디어·광고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개발하고 모니터링 체제를 구축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폭식 조장 미디어’가 ‘먹는 방송’인 것으로 해석이 되며 국가가 취향까지 간섭하느냐는 비아냥이 나왔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엔 규제 반대 청원도 잇따른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세계적 석학 유발 하라리의 ‘호모데우스’(김영사)에 따르면 오늘날 대부분의 나라에선 기아보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가 과식이다. 2014년 21억명 이상이 과체중이었던 반면에 영양실조를 겪는 사람은 8억5000만명이었다. 과식은 각종 성인병을 부르며 의료비 지출 증가, 건강보험 예산 증가, 세금 인상 등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사후 대책도 중요하지만 사전 예방이야말로 작지만 확실한 대책이 될 수 있다. ‘불이 나면 이렇게 해라’ ‘많이 먹지 말거라, 탈난다.’ 시시콜콜해 보이지만 할머니 잔소리가 피가 되고 살이 된다. 할머니 같은 국가가 필요하다.

손영옥 문화부 선임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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