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장윤재] 당신 진짜요? 기사의 사진
독일 사람들은 상점에서 물건을 살 때 먼저 이것을 묻는다. “이거 얼마나 오래 쓸 수 있나요?” 일본 사람들은 이것을 물어본다고 한다. “이거 신제품인가요?”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꼭 이걸 먼저 확인한다. “이 물건 진짜인가요?”

얼마나 ‘가짜’에 속고 살았으면, 이렇게 ‘진짜’인지를 묻는 것이 생활화되었을까. 그런데 사람들은 물건을 살 때만 진짜인지를 묻는 것 같지는 않다. 오늘날 사람들은 주일 아침에 성경책을 들고 교회로 향하는 크리스천들에게 마음속으로 마치 이렇게 묻고 있는 것 같다. “당신 진짜요?” “진짜 크리스천이오?”

가톨릭을 포함하면 한국에 기독교가 전래된 지 200년이 넘었다. 기독교가 처음 조선에 들어왔을 때에는 사회를 변혁하는 힘이 있었다. 특히 위계적이고 가부장적인 가치관에 의해 철저히 소외당하며 살아가던 이 땅의 여성들에게 기독교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 받았다는, 가히 혁명적인 평등사상을 소개함으로써 급속히 전파됐다. 실로 이 땅에 복음이 들어오자 백정이 교회 장로가 되고, 그 백정의 아들이 의사가 되고, 양반 중의 양반인 왕손이 예수를 믿고 자기 말을 끄는 마부에게 ‘형님’이라 부르는 신기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이제 누구의 자식인가로 평가받지 않고 자신의 노력과 성실함으로 평가받는 세상에서 살게 되었다. 그 때문에 기독교는 많은 사람의 인정을 받았고, 하나님의 이름은 이 땅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조차 존귀했다.

하지만 지금의 한국교회는 이러한 복음의 변혁시키는 힘을 상실했다. 일부 목회자들의 도덕적 일탈과 기복신앙, 그리고 사회적 약자들을 혐오하는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태도로 기독교의 대사회적 이미지가 땅에 떨어졌다. 이러하니 전도도 안 되고 선교의 길도 막히기 시작했다. 기독교가 기독교적이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비난받고 고난을 당하는 것은 영광이다. 하지만 기독교가 비기독교적이라는 이유로 세상 사람들에게 지탄을 받는다면 그것은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지금 사람들은 ‘메신저’(그리스도인) 때문에 ‘메시지’(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있다.

미국 남북전쟁 때 ‘프레드릭스버그 대전투’라는 유명한 싸움이 있었다. 육탄전까지 치르고 수많은 부상자를 중간에 남겨 놓은 채 쌍방은 후퇴해 대치하고 있었다. 그때 북군 병사 한 명이 물통을 들고 달려나갔다. 남군에서 사격이 시작됐다. 하지만 이 병사가 목숨을 걸고 남군, 북군 가리지 않고 부상자들에게 물을 마시게 하는 광경을 보고 사격은 중단됐다. 이를 계기로 쌍방은 잠시 휴전을 하고 서로 부상자 처리를 하게 됐다. 그때 남군 장교가 이 북군 병사에게 다가가 묻는다. “What is your name?(자네 이름이 뭔가?)” 그가 대답했다. “My name is Christian(내 이름은 크리스천입니다)” 그때 그는 자신의 부모가 지어준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그때 그는 총탄에 맞아 죽을지도 모르는 사지(死地) 한복판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향해 뛰어나가게 만든 그 이름을 말했다. 그에게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은 결코 값싸고 편리한 이름이 아니었다. 그에게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은 목숨을 건 이름이었다. 전 존재를 건 이름이었다. 만일 오늘날 이 땅에서 교회의 이미지가 땅에 추락하고 기독교 신앙의 진정성이 의심받고 있다면 바로 이런 ‘진짜’ 크리스천의 수가 적기 때문 아니겠는가.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로마서 15:6) 살아야 한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고,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사랑하며 또 동등하고 존엄하게 대하는 성서의 정신을 온몸으로 살아야 한다. 섬김을 받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섬기려 한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정신을 날마다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 그래서 종교가 생활이 되고, 생활이 종교가 되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는 ‘진짜 크리스천’들이 이 땅에 많아지길 간절히 기도한다.

장윤재 이화여대 교목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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