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장지영]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기사의 사진
1917년 최남선이 만든 잡지 ‘청춘’의 문예 현상공모에서 여성 당선자가 나왔다. 주인공은 단편소설 ‘의심의 소녀’로 입선한 20세의 김명순(1896∼1951). 최초 근대 여성작가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김명순은 등단 이후 20여년간 소설 25편, 수필 20편, 시 111편, 희곡 2편, 번역소설 1편, 번역시 15편 등을 발표했다. 진명여고를 차석 졸업한 그는 불어 영어 독어에 능숙했고, 일본 유학도 여러 차례 다녀왔다. 하지만 당시 문단은 그의 작품을 폄하한 것은 물론이고 그를 ‘문란한 여자’라며 철저히 배제했다.

그는 일본 유학 시절이던 1915년 조선인 출신 일본군 소위 이응준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삼촌의 소개로 만난 이응준은 그의 맞선 상대였다. 그가 자살 시도를 하면서 사건이 세간에 알려졌는데, 피해자인 그가 오히려 학교에서 제적당했다. 또 당시 조선의 매일신보는 그가 이응준을 짝사랑하다 실연당해 자살을 시도했다고 엉터리 보도를 했다.

겨우 마음을 추스른 김명순은 ‘의심의 소녀’ 당선 이후 1919년 일본 유학생들이 만든 우리나라 최초 문예지 ‘창조’ 동인으로 본격적인 작가 활동을 시작했다. 1925년엔 매일신보 여기자 공채에 합격해 기자로 일하기도 했다. 그는 어머니가 기생 출신 소실이라는 콤플렉스 때문에 성(性)에 대해 문란하기는커녕 보수적이고 조심스러운 편이었다. 하지만 당시 가부장적 인식에 찌든 문단은 좌·우파 가리지 않고 그를 공격했다. 김기진 염상섭 방정환 차상찬 등 여러 문인이 그를 “남편 많은 처녀” “피가 더러운 여자”라며 모욕했다.

김명순은 반박문을 쓰거나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는 등 적극 대응했다. 1925년 여성 작가로는 처음 작품집 ‘생명의 과실’을 출간했으며 이후 많은 작가들이 친일로 변절하는 동안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일제에 저항하는 글을 썼다. 하지만 오빠 친구로 가깝게 지내던 김동인이 1939년 그를 모델로 신여성들이 성적으로 타락했다는 내용의 ‘김연실전’을 출간하자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받았다. 절망에서 헤어나지 못하다 조선을 완전히 떠났다. 도쿄에서 곤궁하게 살던 그는 결국 정신이 이상해졌고, 정신병원에 강제 수용돼 세상을 떴다. 그가 온갖 고난을 당하며 사는 동안 가해자 이응준은 친일파 군인으로 호의호식하며 살았다. 광복 이후에는 대한민국의 초대 육군참모총장에 발탁됐으며, 체신부 장관까지 역임했다.

그가 자신은 잘못이 없다고 피눈물을 쏟으며 절규하는 모습은 최근 국내에서 미투 운동에 참여한 피해자들과 오버랩된다. 많은 성폭력 피해 여성들이 용기를 내서 고백했지만 “옷을 야하게 입었다” “원래 성적으로 부도덕하다” “남자의 앞길을 망치는 꽃뱀” 등의 비난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국내 미투 운동 1호 재판이었던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김지은 전 정무비서 성폭행 혐의에 대해 1심에서 무죄가 선고되는 과정을 보면서 분노를 금할 수 없다. 우리 사회가 김 전 비서에 대해 처녀가 아닌 이혼녀이기 때문에 진정성이 의심된다거나 불륜녀 프레임을 씌워 2차 가해를 반복적으로 하는 상황이 100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에 좌절감마저 느꼈다.

안 전 지사는 김 전 비서의 폭로 이후 스스로 합의에 의한 관계가 아니었다며 사과문을 올린 뒤 도지사에서 사퇴했다. 게다가 증거로 채택된 휴대전화도 제출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안 전 지사가 100% 무죄를 받을 수 있단 말인가.

재판부는 업무상 위력 관계인 점이 인정되지만 위력을 실제로 행해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했다는 판단을 내리기엔 범죄가 충분히 증명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김 전 비서에게 ‘정조’ ‘피해자다움’을 운운하며 시대착오적 시각을 고스란히 드러냈던 재판부가 판결 선고문에 성적 자기결정권을 들먹인 게 어이없다. 재판부가 성적 자기결정권을 제대로 이해하긴 했는지 묻고 싶다.

장지영 국제부 차장 jyja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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