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권기석] 사회적 합의는 연금 해법 아니다 기사의 사진
사회적 합의란 말은 듣기에 좋고 말하기에도 편하다. 사회 구성원이 뜻을 모아 문제를 해결하겠다는데 반대할 이유를 찾기 힘들다. 필자도 논란을 다룬 기사에서 ‘사회적 합의를 해 보자’고 쓴 적이 여러 차례 있다. 최근 국민연금 제도 개편안에 관한 불만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사회적 합의가 해결책인양 거론되고 있다.

이 말을 먼저 꺼낸 사람은 문재인 대통령이다. 문 대통령은 지난주 “국민의 동의와 사회적 합의 없는 정부의 일방적인 국민연금 개편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더불어민주당도 곧바로 “사회적 논의 기구를 구성하자”고 거들었다. 지난 17일 국민연금 제도개선 공청회에서 권덕철 보건복지부 차관은 “사회적 합의 없이 연금 개혁을 추진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다른 건 몰라도 국민연금 제도 개편 문제만큼은 사회적 합의로 해결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정부가 이 문제에서 사회적 합의를 거론하는 건 국민연금 제도를 손대지 않고 그냥 놔두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지금의 국민연금 체계는 과거 사회적 합의의 결과물이다. 연금 전문가로 구성된 재정추계위원회는 5년마다 국민연금 재정 건전성을 평가한다. 이번처럼 2003, 2008, 2013년 재정추계에서도 국민연금 적립금 고갈 시점이 예상됐고 보험료를 올릴 필요가 있다는 진단이 제기됐다. 국회는 상임위원회와 소위원회에서 이를 논의했고 공청회를 개최했다. 연금제도개선특별위원회(18대 국회)를 만든 적도 있다. 국민 대표인 국회의원이 공개된 장소에서 전문가와 함께 대안을 모색했다. 다름 아닌 사회적 합의 과정이었다.

현재 연금 체계의 뼈대인 보험료율 9%와 소득대체율 40%(2028년까지 단계적 하향)는 2007년 이런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다. 당시 복지부는 보험료율 12.9%와 소득대체율 50%가 적절하다고 제안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결과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용돈 수준을 넘지 않는 국민연금이다.

대통령과 여당, 정부가 앞으로 하겠다는 사회적 합의도 과거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설문조사를 하고 공청회를 열 것이다. 원전 문제에서처럼 공론화를 거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는 국민연금 제도의 어떤 것도 건드리기 힘들다. 과거 사례가 이를 보여준다. 다음 선거를 치러야 하는 국회의원들은 당장 보험료를 더 내기 싫다는 국민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다. 정권을 지키고 싶은 정치인들은 현재의 합의를 핑계로 미래의 위기를 외면했다.

국민연금 문제에서 사회적 합의가 부적절한 또 다른 이유는 기성세대의 이해관계만 반영될 가능성이 커서다. 자꾸 국민연금 개편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는 이대로 가면 미래세대의 부담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때문이다. 연금 고갈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그 시점은 노인인구 비중이 지금보다 훨씬 더 커져 있을 때다. 미래세대는 엄청난 사회적 부양 의무를 지게 된다. 지금 어린이집에 다니거나 엄마 뱃속에 있거나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이 부담을 떠안을 것이다. 이들에게 2018년의 사회적 합의는 원망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정말 국민연금을 그럴듯한 제도로 바꾸고 싶다면 사회적 합의라는 방패 뒤에 숨을 게 아니라 국민을 설득해야 한다. 노후의 삶에 진정 도움이 되는 연금을 타려면 보험료를 지금보다 좀 더 내야 한다고 말이다. 미래세대의 부담을 덜어주려면 언젠가는 연금 타는 나이가 늦어질 수 있다고 솔직히 설명해야 한다. ‘동의하지 않으면 하지 않겠다’고 이야기할 게 아니라 ‘사정이 불가피하니 믿고 따라 달라’고 호소해야 한다.

지지율이 떨어질 수 있고 정권의 기반이 흔들릴 수 있다. 유럽에서 연금 개혁을 한 정부는 정권 재창출에 실패했다. 하지만 언젠가 누군가는 꼭 해야 할 일이다. 문재인정부가 용기를 냈으면 좋겠다. 국민연금 소득대체율 인상을 대선 공약으로 내걸었을 때 각오했던 일 아닌가.

권기석 사회부 차장 key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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